Classic-연주

James Last: W.A. Mozart Sonata No. 6 Adagio

리멘시타 2018. 12. 5. 17:15


One of the most popular pieces, not just from Mozart`s opus,

but in whole classical music, this time in specific,

 exceptional performance of James Last, his orchestra and chorus.



W.A.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A.Mozart, 1756~1791)



모차르트의 생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나타내어 4세 때 건반 지도를 받고

 5세 때 소곡(小曲)을 작곡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각지의 궁정에 알리기 위하여 아들이 6세 되던 해부터

여행을 계획하여 1762년 7월 바이에른 선거후의 궁정이 있는 뮌헨에 가서 연주하고,

이어 빈으로 가서 여황제 마리아 테레사 앞에서 연주하는 등 많은 일화가 있다.



잘츠부르크 전경


작곡가로서 그의 활동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준 것은 서유럽을

거의 일주하다시피 한 여행(1763∼1766)이었다.

 여행에서는 파리에서 알게 된 J.쇼베르트(1720?∼1767), 런던에서 알게 된

 J.C.바흐(J.S.바흐의 막내아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 파리에서는 바이올린소나타를, 런던에서는 최초의 교향곡(제1번 Eb장조) 등을

작곡했는데, 이 교향곡은 8세 때의 작품이었다.

두번째로 빈을 다녀온 후, 1769~1773년에는 3번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는데

그 동안 교황으로부터 황금박차(拍車)훈장을 받고,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입회시험(入會試驗)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볼로냐에서 마르티니로부터 음악이론·작곡을 배운 일과

 이탈리아의 기악·성악에 직접 접한 일 등은

그후의 교향곡·오페라·교회음악 창작에 풍부한 자극이 되었다.


잘츠부르크의 고성


그는 이때 10대 소년으로 오페라의 작곡 의뢰를 받고

밀라노에서 작곡한 오페라를 상연(1770)하였는데, 제2회(1771)와

제3회(1772∼1773)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 곳에서

 오페라를 작곡 상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후 1777년까지는 주로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으나,

차차 그 직무에 불만을 갖기 시작하여 1777년 가을부터 1779년까지

 어머니와 함께 다른 궁정에 취직하기 위하여 만하임·파리를 여행하였다.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음악면에서는 만하임악파와 접촉하는 등

수확이 컸고 이때 《파리교향곡》(1778) 외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또한 만하임에서의 아로이지아 베버와의 사랑, 파리에서의 어머니의 죽음 등

 인생의 경험도 많이 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궁정음악가로서의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780년 말 뮌헨궁정으로부터 의뢰받은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의

  상연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대주교 히에로니무스와의 불화가 표면화하여,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와

사표의 반려에도 불구하고 빈에서 살기로 결심, 그의 인생의 후반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빈에서는 처음 작곡·연주(피아노)·교육활동을 하였으며,

오페라 《후궁(後宮)으로부터의 도주》(1782)와 《하프나교향곡》(1782),

피아노협주곡 등을 작곡하였고 1782년 8월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그가 빈에 머무는 동안에 작곡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은 하이든의 것과 함께

고전파시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는 작품이 되었다.

하이든과는 1785년경에 직접 알게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빈시대의 후반에 접어들자 모차르트의 작품세계는 한층 무르익었으나,

그 반면 빈의 청중들의 기호로부터는 차차 멀어져,

생활은 어려워지고 친구들로부터 빌린 빚도 많아졌다.

1786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그러한 상황이 눈에 띄게 나타났는데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돈 조반니》(1787) 등의 오페라는 이 시기의 걸작들이다.

후자가 초연(初演)된 해 4월 베토벤이 찾아왔고 5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구르크의 뒤를 이어 궁정실내작곡가의 칭호를 받았으나,

이것은 이름뿐이고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닥쳐오는 경제적인 궁핍 속에서 이른바 3대교향곡 《제39번 E장조》

《제40번 G단조》 《제41번 C장조:주피터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그 후에도 모차르트는 몇 차례 여행을 하였다. 1789년의 베를린 여행에서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알현하여 작곡의뢰를 받았다.

이듬해 초에는 오페라 부파 《코시 판 투테》를 완성하고,

가을에는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대관식협주곡》 등을 포함한 연주회를 열었으나 빚은 늘어날 뿐이었고

1791년 8월 의뢰받은 오페라 《티투스제(帝)의 인자(仁慈)》의 상연을 위하여

프라하로 여행하였으나 이 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9월에는 징그슈필의 대작 《마적(魔笛)》을 완성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레퀴엠》을 미완성인 채 남겨 두고 12월 5일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빈시의 성마르크스묘지에 있다.



36세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생애였으나,

어려서부터 창작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성악·기악의 모든 영역에 걸쳐 다채롭다. 그의 공적은 하이든과 함께

빈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데 있으며, 그를 앞섰던 이른바

전고전파(前古典派)의 여러 양식을

한몸에 흡수, 하이든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개성적인 예술을 이룩하였다.

찰츠 부르크의 미라벨 정원 /Sound of Music 의 배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