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탄 가자지구의 이스라엘 분쟁의 역사 (로마 카톨릭과 회교도 시작)
▷ 족장시대
아담
노아 2600 중국역사 시작
2161 아브라함
(창세기12장)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편집자주☞가나안땅이 지금의 이스라엘입니다 그 크기는 (강원도 만한 땅이라 합니다)
1950 이삭
1900 야곱(이스라엘) 페니키아인 알파펫사용
요셉 애급생활
▷ 율법시대
1520 모세 중국 은나라 건국
1441 출애급 (Exodus) 광야생활 / 여호수아
▷ 사사시대 16명의 사사 400년간 (성소중심의 연합된 일종의 인보 동맹체재)
1374 옷니엘 / 에훗 / 삼갈
1200 드보라 / 바락
1150 기드온/아비멜렉/돌라/야일/입다/입산/엘론/압돈
1085 삼손/엘리1025 사무엘 (요엘.아비야)
▷통일왕국 시대 160년간
사울
다윗
솔로몬
▷분열왕국 시대
북 이스라엘 (10지파)
남 유 다 (2 지파) 775 제1회 올림픽
557 로마시 건설
722 사마리아 함락 앗수르 포로
앗시리아(Assyria) 성경에 152회 등장하는 앗시리아는 1843년 보타와 레이아드가 메소포타미 황폐한 둔덕에서 니느웨를 발굴하기 전까지 지구상 어떤 문서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제국으로 BC2500년 생겨난 도시국가로 1400년엔 상비시민군으로 1200년에는 강대국 바빌로니아를 지배 960-612년 사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제국을 형성 동서로는 인도에서 이집트 남북으론 아라비아에서 러시아까지이다 그러다 612년 연기처럼 사라지고 이 세상 어떤 문서에 기록도 없이 다만 성경에만 기록되어 젖던 앗수르 그래서 성경은 믿을 수 없다고 당시학자들은 주장했으나 발굴로 성경이 사실인것이 증명됨
니느웨에있는 산헤립 궁전의 부조 앗시리아 기마병
609 애급통치
587 예루살렘 함락
▷ 바사시대 587-331
539 바벨론 포로 557-447 석가탄생
604-539 바벨론 관활 551-478 공자탄생
538 고래스 포고령 고국귀환
520 학개 / 스가랴
481 에스더 왕후됨 470-399 소크라데스
458 에스라 귀환 428-348 플라톤 (소크라데스제자)
445 느혜미야 성벽
425 말라기 384-322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제자)
332 알렉산더 정복 (아리스토텔레스제자) 맹자탄생 / 페르시아 멸망323 알렉산더 32세 졸하다
▷ 헬라시대 BC331-AD63
329-198 톨레미 통치
198-165 셀레우키드 통치
166-AD63 하스몬 통치 BC57 신라건국
마카비 통치 . 반란 (외경에 마카비서 포함)
▷로마시대 BC63-AD135
BC27-14AD 가이샤 아구스도 (BC37-4 헤롯왕 유대다스림 BC37 고구려건국
(BC4-AD-39) 갈릴리 본붕왕 헤롯 안티파스
AD14-37 디베료 가이샤 (BC4-AD34) 이두래 본봉왕 헤롯 빌립
세례요한
예수 그리스도
AD26-36 빌라도 백제한산도읍
마24: 2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 우리라
눅23:28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구레넷 시몬과 십자가 바꾸어 멜 때 하신 말)
마27:25 그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리소서.
서기32년.4.6 유대인 대표주후64년 로마 식민지하의 유대총독으로 네로 황제는 「베시우스 플로루스」를 임명하였으나 유대인에게 호응을 얻지 못하자 은근히 폭동을 일으키도록 조작하여 약탈을 일삼자 사해 근방에 있는 맛사다 요새를 탈취하자 이의 보복으로 가이샤라에서 2만명학살하고 갈릴리 청년을 고린도로 1200명이 끌려가 혹사당하고 3만 명이 노예로 팔려감으로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됨
66년 헬라인에게 유대시민권을 주는 것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29세의 네로황제는 베스파시안에게 그 아들 타이터스를 대동 5만8천의 군대로 예루살렘을 치게 하고 당시 유대 장군 요셉푸스와 접전 4만의 병력을 잃고 패함
네로가 자살하자 (네로-동생 처 빼앗아 3째부인 삼음. 원로원의 결의로 퇴위 69년 자살) 베스파시안은 피선거권으로 로마에 복귀 황제가 되고 그 아들 타이터스로 다시 침략 69년말부터 예루살렘 성벽을 10만의 병력으로 포위 3중의 성벽 90개의 탑 기초석이 5M가 넘는 큰 바위로 성벽 높이가 20M나 되며 경사 20° 로 난공불락의 요새,
70년 4월~8월28일까지 약 5개월 동안 성벽 주위에 토성을 쌓고 포위 성안에는 굶주림. 내란. 탈출. 살해.
이들은 이미 왕하6:29 구약시대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 굶주림에 지처 자식을 잡아먹은 경험 있는 백성들
로(신28:52-57 성읍을 에워싸리니 자식을 잡아 먹을 것이라) (레26:29 너희가 아들과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하루에 5백명 이상이 탈출 포위 기간에만 11만6천명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 피를 우리와 후손에게 돌리소서” 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형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함
5개월간의 전투에서 40개의 투석기 300여개 화살기로 공격 70년 8월5일 안토니오 성탑이 점령되고 8월28일 완전 점령성이 불탈 때 7백만 명의 남녀노소가 불에 타 죽고 성이 불탈 때 성전안의 금장식들이 녹아 바닥 돌사이사이로 흘러들어가자 점령군들이 바닥 지렛대로 돌을 뒤집음으로 벽이 무너지고 로마군의 5개월간의 전투로 간신히 점령한 예루살렘 성을 다신 재건치 못하도록 포로와 노예를 동원 기초석까지 뒤집어 놓음
마24: 2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 우리라
현재 남아있는 서쪽 벽 (일명 : 통곡의 벽)이 남아있는 것은 2가지 전설에 예화가 있다함
1. 이런 난공불락의 요새를 점령했다는 로마군에 대한 찬양의 기념비로 남겼다는 설과
2. 6명의 천사의 눈물이 흘러 성벽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환상을 보고 헐지 않았다는
통곡의벽
약 10만 이상의 유대인들이 당시 노예 시장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끌려가 노예로 풀어놨으나 신28:68- 애급으로 끌고 가 노예로 팔려하나 너희를 사갈 자 없으리라<율법-음식. 안식일지킴) -결국 죽음
점령시의 광경이 너무 처참하여 타이터스 자신도 겁에 질려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절규
그 외에 이들에 전형적인 풍습인 금을 빵에 싸서 삼키고 탈출
금을 찻기 위해 탈출자들이 잡혀 하루 500명에 배를 가르고 창자를 훑어가는 참혹함이 더함
일련의 유대교의 한 갈래인 젤로트파 교인 1천여 명이 맛사다 요새로 피신 겔리라전을 펼치자 황제는 72년 로마 제10군단 사령관 실바장군의 9천의 군사와 6천의 전쟁 포로를 끌고 와 흙과 돌을 다져 200M의 언덕을 쌓고 공성 탑에서 엄호사격 투석기에서 23㎏의 돌덩이로 공격 무너지자 나무와 흙을 지그재그로 쌓아 보수하자 불화살로 공격 나무 벽에 불이 붙으며 무너지자 실바는 미소를 머금고 진지로 물러남 다음날 구름다리를 놓고 쳐들어가기만 하면 됨 그날 밤 유대인 젤로트파 지도자인 벤야이르는 날이 밝으면 마사다는 점령될 것이 다며 비장의 마지막 연설을 합니다.
"형재 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어둠이 물러가면 우리는 저들에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아내와 자식들이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기 전에 그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우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입니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란 이름의 수의를 입읍시다. "벤 야이르 말이 끝나자 어떤 이들은 기꺼이 그 말을 따르려 했지만. 마음 약한 사람들은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벤 야이르는 그 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부끄럽지도 않소?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여기 모여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 없는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오. 다마스커스에서는 1만8천명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 이집트에서는 6만명이 죽었오. 우리는 험준한 요새와 넉넉한 식량을 가지고도 이 싸움에 졌습니다.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 주겠 다고 꼬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고, 우리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용기로써 로마에 반란을 일으켯오, 아직도 우리 손은 자유롭고, 이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오,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그 용기로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읍시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경탄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성을 불 질러 로마인들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식량 창고 한두 군데는 남겨 놓으시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었다고 보여서는 안 됩니다.'남자들은 경건한 얼굴로 흩어져 갔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부드럽게 껴안고 아이들을 감싸고 눈물이 그득한 채 긴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나서 아내와 아이들을 그들의 손으로 죽였다. 남자들은 다시 한 곳에 모였다.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가려내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식구들의 주검 옆에 눕자, 열 사람은 그들을 차례차례 칼로 베었다 살아남은 열 사람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그 마지막 한 사람이 나머지 아홉 사람을 죽였다.
맛사다 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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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사다 요새 |
맛사다 유적 지도 |
로마군이 쏜 돌포환 20-25K |
'로마 군대가 마사다를 함락시켰을 때, 동굴 속에 숨어있던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이를 발견했다.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마사다 최후의 증인들이었다.' 요세퍼스는 이들의 증언을 그의 역사책 '유대인 전쟁기'에 기록하여 남겨놓은 것이다.
유대인역사가 요세푸스(로마시민권자)의 역사이야기는 어떤 기록에도 없었으나 1838년 두 미국인 학자에 의해 발견되고 발굴 1963년 이스라엘 정부가 전면 발굴함으로 요세푸스의 역사가 입증되어짐
이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지구 역사에서 없어지게 되며 이들에 새로운 역사 디아스포라(the Diaspora) 신4:27, 28:64, 레26:33, 렘9:16, 눅21:24<열국 중에 흩을 것) 전 세계에 1천6백만이 흩어져 살며 이스라엘엔 겨우 26만 명이 거주 (현 팔레스티나의 사태 (중동의 화약고))
이 사건에서 하나님에 역사는예수님의 사후에 기독교인의 거취는 말씀대로 보혜사 성령이 임함으로 교회가 시작되고 성령의 담대함을 입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함으로 하루 3천 명씩 회계하고 돌아오게 되자 대박해가 일어남 스텐반의 순교 사울은 이방까지의 박해로 인해 기독인들은 예루살렘 함락 당시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있었던 관계로 죽음을 모면 하게 되고 기독교의 가장 적인 유대교의 말살로 인해 어려움 없이 바울의 시민권으로 전파기독교와 로마제국의 관계는
① 판도확대
② 교통편리
③ 언어통일 BC332년 알렉산더-헬라어 로마-라틴어
④ 회당건립⑤ 도덕부폐 노예매매. 자식 죽이는 권한. 음란. 원형극장
⑥ 종교상태 잡신 모르는 신에게
예루살렘성 함락전
64.6.18 네로의 방화로 로마시 14구 중 3구 완전 소멸. 11구-반소멸 (불빛보고 생일잔치)
예루살렘성 함락후
81.-96년 도미티안황제 예배 강요로 카타콤(지하.무덤동굴에서 예배) 생김
10대 박해 64년 (네로)~305년 (레오 클레시안)까지
대표적은 135년 하드리안 황제는 이스라엘 전역 985개 도시를 파괴 58만 명을 학살 예루살렘을 『아에리아 칼피톨리나』로 개명 이 교도의 땅이됨
AD100년후
플라톤 학파 켈서스(celsus) 교리부정
신플라톤학파 플로티노 신비철학 구성
폴피티 (304년 사망) 15권의 저서로 교회 공격
속사도 교부의 신학으로 (교부(감독) 교부 사도의 직계제자 라도 문서.서적을 남긴 자
클레멘트. 익나티우스. 폴리갑. 파피아스
터툴리안 (Tertullianos) 대표적 라틴교부 160년 칼타고 출생 삼위일체 교리를 말함
키프리안 (Cyprlanus) 200-258 칼타고 교회 감독으로 로마교회 창시자라 할 수 있음
교회론 : 교회 안에서 만이 구원이 있다고 주장 교회를 떠난 자는 속인이요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
님을 아버지라 칭 할 수 없다노아방주 밖의 사람이 멸망한 것처럼 교회 밖의 사람도 멸망한다. 교회는 감독에 의
해 세워졌으니 감독 없으면 교회도 없다 교회 통일 주장
312년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자진 퇴위하자 황제의 위를 다투는 자가 동에 리시니어스, 막시무스디아스, 서에 콘스탄틴,
막센티우스가 일어남 이들은 서로 엇갈리게 동맹을 맺고 막센티우스는 이교의 신에 도움에 힘을 얻자 열세의 오합
지졸로 구성된 콘스탄틴 수하에는 기독교인이 있어 정오 기도 할 때 태양위에 십자가와 이에 의해 이기라는 환상
을 보고 (전군이봣다 함) 그 밤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 십자가를 보이며 이것을 군기로 삼아 싸우라는 명령을 받음,
십자가의 군기를 세우고 멜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의 정규병을 격파 로마을 점령 밀란(Milan)에서 리시니어
스를 만나 동서 제국을 나누고 거기서 유명한 밀란 칙령을 발표 (기독교 공인313년)
332년 로마에서 콘스탄틴노풀로 천도 (우상이 많은 서로마는 리시니어스에게 )
이유 : ① 동구 야만인과 페르시아를 막고
② 우상 없는 순수한 기독교 국가 건설
업적 : ① 궁중에서 설교. 이단 멸하고 교회 통일도모. 십자가형. 검투. 화인폐지.
여자 : 토지외는 소유권 인정. 교회법 국가공인. 총회결의는 국가의 법이됨. 교회의 법은 불가침(황제의 법도 번복
할 수 있다) 교직자가 사죄권요구. 주일휴업. 교직자.세금.병역면제. 박해시몰수제산 반환등
니케야회의
1회 325년 5월 콘스탄틴 황제 소집
의제 : ① 아리우스 설 (교회 피조물 창조는 중계자 직분줌.인성없다.선행으로 상급 교회 받았다)
2회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오도시우스 황제 소집
의제 : ① 아폴리나리스 설 (그리스도의 인성제한. 그리스도는 하나님말씀. 사람영이 없다
3회 431년 에베소에서 비오도시우스 2세 황제 소집
의제 : ① 신성과 인성 구별 양성론 신(로고스)이 임한 것
4회 451년 칼켓톤 마르키아누스 황제 소집
의제 : ① 장로교 기본 신조 구성
5회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유스티아누스 황제 소집
의제 : ①일성론 자와 화해하려고 3장령을 발한 때문
6회 680년 콘스탄틴노플에서 콘스탄틴4세 황제 소집
의제 : ① 일의설 양성을 가젖으나 신의만 가젖다
7회 787년 니케야 에서 콘스탄틴 6세 소집
의제 : ① 성화. 숭배문제(성상.십자가.복음서등) 결과 : 하기로
수도원의 시작
국교와 규칙화 조직화됨으로 세속화 되어가자 독신. 금욕. 경건. 운동 일어남애급의 부자아들로 안토니우스가 조실부모하고 마19:21(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에 감동되어 누이를 타인에게 맡기고 재산 다 팔아 구재하고 암굴로가 운둔 추종자 많음
이슬람 (Mohammedanism)
마호메트 570출생 - 632.6.8사망
마호메트를 〈코란〉의 저자다. 그러나 이슬람의 기본적인 교리에 따르면 〈코란〉은 신의 계시이고, 그는 신의 계시를 인류에게 전하는 전달자에 불과하며 정통파의 이슬람교도에게 있어서 그를 〈코란〉의 저자로 본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다. 라한다. 사실이다 마호메트는 까막눈이다 한 줄에 글도 쓰지 않았고 사후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임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출생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6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고아 마호메트는 처음에 조부 그의 사후에는 숙부에게 양육되었다. 그는 또 잠시 동안 메카 근교 유목민 부인에게 양자로 보내져 목동으로 소년시절을 가난하게 보내야 했다. 장성했을 때, 낙타대상을 따라다니던 중 부유한 미망인 하디자가 마호메트에게 대상을 맡기고. 그는 25세 때 하디자(40세)와 결혼했고, 그의 가르침을 믿고 이슬람교도가 된 최초의 사람이었다.
610년경 마호메트는 대상을 따라다니며 유대인들에 종교를 받아들여 히라산에서 영적체험을 하게된다
(대천사 가브리엘에 의해 신의 말씀이 계시) 선교를 시작함 40세
이슬람교가 사막의 유목민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도시, 특히 상업과 금융업에 대한 탐욕적인 관심이 특징인 메카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각처로부터 순례자들이 모이는 카바 신전은 메카에 이익을 가져왔고, 순례달에는 상설시장이나 정기시장도 번창했다. 메카에서는 이렇게 상인공화국, 즉 가장 부유한 상인들로 이룩된 평의회가 지배하는 과두정치가 성장하고 있었다.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이러한 메카의 금권 과두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반대는 처음에는 조소와 끝없는 논쟁에 그쳤다. 그러나 곧 박해가 시작되고, 615년에는 그 박해가 심해져 그는 씨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신자를 그리스도교 국가인 에티오피아로 피난시켰다. '애도(哀悼)의 해'라고 불린 619년 마호메트는 애처 하디자와 숙부 아부 탈리브를 잃었다. 메카 이외에서 피난처를 찾던 그에게 야스리브라는 도시가 원조의 손길을 내밀었다. 야스리브는 마호메트에게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기 때문에 후에 '예언자의 도시'(madinat an-nabiy)라는 이름으로 고쳐졌다. 현재의 메디나(마디나의 전와)가 그곳이다.
메디나는 메카와 달리 광활한 오아시스에 위치해, 주민은 대추야자 재배를 업으로 하는 농민이었다. 이곳에는 서로 패권을 한편 그로서도 상당한 수의 유대교도가 사는 메디나는 같은 일신교인 이슬람의 신자 획득에 안성맞춤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메디나의 아랍인과 마호메트 사이에 은밀한 교섭이 진행되고, 그결과 622년 아카바의 맹약이 체결되어 메디나의 아랍인은 마호메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곧 메카의 이슬람교도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메디나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함에 놀란 메카의 대상인들은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그는 교묘하게 난을 피해 그해 9월 24일 무사히 메디나에 도착했다.
622.7.16 헤지라(이주)를 기념으로 이스람력 원년으로함
624년경 키브라 하루세번 예루살렘성전 방향으로 기도하는 것을 유대인들의 터부로 메카의 카바신전(아부라함이 건립?)
으로 바꿈 으로 유대교보다 훨씬 오래된 일신교리가 확립됨
키브라 (다니엘서 6장 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624년 카바신전을 키브라로 바꾸고 메카대상 바드르 습격으로 대승 1년뒤 복수를 위한 전쟁에서 메디나로 정찰하여 안
식일에 기습 마호메트는 큰 패배로 코란에 내용도 변한다 일부일처에서 일부다처로 알라의 계시라하여 전쟁으로
남자가 다수 희생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한다
630년 1월 부족간 전쟁에 메카가 중립조항을 어기자 그 즉시 진격 메카는 무저항으로 항복하고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다
신교 신전인 카바를 이슬람교의 최고신전으로 삼을 것을 명령하고카바주민 거의다 이슬람교로 개종
카바신전
이슬람 세계의 중심은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이다. 원래 카바 신전은 아라비아의 360 여 개의 수호신 및 자연신을 섬기는 신전이었다. 그 기원과 건립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슬람 교에서는 유대 민족의 조상이며, 동시에 아랍 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유일한 신이 카바 신전의 주신인 '알라'라고 주장했던 마호메트는, 유일신인 알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스마엘을 바치도록 명령했을 때, 아브라함은 알라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알라는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스마엘을 다시 살렸다. 그 후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그 검은 돌이 있는 자리에 신전을 건립했는데, 그것이 바로 카바 신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타락하여 그 신전 안에 온갖 신상을 가져다 놓고 우상을 경배함으로써 알라를 욕되게 했다. 마호메트가 속한 부족이자 당시 메카를 거느리던 쿠라이쉬(Quraish) 족이 이 신전에서 여러 신을 섬겼으며, 신전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경제적 주도권을 획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호메트는 메카의 쿠라이쉬 족의 다신교 신앙을 거부하고, 유일신인 알라만이 카바 신전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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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돌 |
카바 모형 |
카바신전 |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 제창되고, 메카를 신앙의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교는 점차 유대교·그리스도교와는 다른 종교라는 것을 명백히 했다.
확실히 마호메트의 설교는 처음에는 일신교 신앙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늘 강조했다. 이런 사실은 예컨대, "신은 노아에게 알리신 것과 같은 종교를 그대들에게 정하시고, 아브라함·모세·예수에게 알리신 것과 같은 종교를 그대들에게 계시하셨다"고 한 것처럼,
〈코란〉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또 이슬람교도는 계전(啓典)의 백성(곧 유대교도)과 다투지 말고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계시된 것을 믿고, 그대들은 그대들에게 계시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신과 그대들의 신은 같으며, 우리는 이 신을 믿고 의지합니다"라고 말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나 시대 초기부터 율법을 모세의 이름에 대한 온갖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도는 이슬람교도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오히려 메카인에게 가담했다.
그러나 3개 부족의 유대교도는 일치단결해 마호메트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각기 고립된 움직임을 보여, 2개 부족은 메디나에서 추방되고 나머지 1개 부족은 멸망했다.
마호메트는 후다이비야 조약을 맺은 뒤 유대교도가 사는 중요한 오아시스 취락인 카이바르를 정복해(628) 아라비아 반도의 유대교도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유대교도와의 관계에 비하면 그리스도교도와의 관계는 대체로 양호했다. "신자(이슬람교도)에 대해 가장 친밀한 애정을 가진 자는 '우리는 그리스도교도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사제나 수도사가 있어 오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코란〉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퍼지고 그리스도교도 집단과 접촉이 잦아지자 양자 교리의 기본적인 차이가 분명해져 불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631년 예멘 나지란의 그리스도교도 사절과의 종교 문답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교리를 둘러싸고 결렬된 것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마호메트는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모스크(이슬람교 성원)의 일부를 그리스도교도를 위해 개방해 그들이 거기에서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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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니파는 정통파 회교도들로서 선지자의 도를 따르는 무리들이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회교도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마호메트 생전의 모든 법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2) 시아파는 오늘날 이란을 중심으로 한 종파로서 주로 활동을 강조하는 자들이 모인 집단이다.
3) 수피파는 이슬람교 내 신비주의자들로서 정통과 회교도들에 대항하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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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한손엔 코란 한손엔 검 이제는 한손에 코란 한손에 오일
마호메트교-이슬람교-회교도-무슬림 모두 같은 뜻이다
회교도가 믿는 하나님은 곳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알라신은 아랍어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영어로는 (GOD)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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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사 (암흑기) 590-15179 (종교개혁)
590년 과도시대 (그레고리1세즉위)(황제 이름뿐 실권 없음) 교황 되라 했으나 거절 도망 잡혀 9월 교황됨
(업적 : 교직매매.교직자결혼금함.영국전도 수도사파견성공. 연옥설 주장.성자.성모예배시작)
800년 성장시대 (촬스대재즉위) (샬만.샤르망) 모하멛군 격파하고 768년 즉위 46년간 영지확대. 정벌전쟁 50회 서는 서
반아(스페인) 사라센(페르시아). 남은 이탈리아 롬발트. 동은 샥숀(영국)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 레오
3세 대관식 로마황제 칭호수여 (찰스대재 대관식에 목회자를 초대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왕관을 씌어주
자 이때부터 교황권위가 생겨나기 시작함)
1073년 전성시대 (그레고리7세즉위) 교직매매. 독신강행-이혼안하면 간음죄 간주.교직.임명. 면직. 재산을 교황 권에 둠
교황은 국왕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 주장
1303년 쇠퇴시대 (보니파시우스 교황)
1517년 종교개혁(샤롤마뉴) 찰스대재가 사후 아들 루이(경건왕) 즉위 죽자 영토가 3아들 앞으로 분활됨
936-973 옷토1세(게르만족-독일왕) 찰스대재 유업 계승 <신성로마제국 건설 외적 침입 격퇴 놀만족. 사라센. 헝가리.
보헤미야(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를 항복시키고 영토확장 교황 요한12세는 그의 공적을 찬양 962.2.2
신성로마 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줌 (준 것은 실제 존재가 아니다. 어떻든 교황이 대관식으로 인해 교
황권 부활) 이후부터 동로마 국왕은 이태리 왕을 겸하는 자격을 얻음 이태리왕권이 무너지자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가 됨
그레고리7세 본명(힐데브란트) 교황권 확립 로마교회 구원운동 지도자
그레고리의 의 주장에 독일황제 헨리4세는 교황을 반대하자 독일 토지반이 감독과 사원의 소유. 이것
이 교황에게 돌아가면 황제 실권 상실 독일황제는 이태리 반대파와 결탁 1076년 웜쓰 종교회의를 열고
교황을 폐위 교황은 헨리4세를 출교 (국민은 국왕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 제후들이
국왕을 반대하자 국왕은 사죄할 것을 결심 1077년 교황이 카놋사에 갔을 때 국왕은 겨울에 알프스 산
을 눈을 맞고 넘어 3주야를 맨발로 베옷 입고 사죄하여 죄사함을 받음. 교황이 출교 해제하자 왕은 돌
아와 반대 제후 보복. 교황이 다시 출교하자 민심은 왕에게 동정, 헨리4세 로마점령 교황 그레고리7세
는 남이테리 사테루노로 도망 거기서 죽음
1198-1216 익노센트3세의 사상
교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와의 왕인 까닭에 국왕 심판할 수 있다.
교황은 하나님보다 낮으나 사람보다 우월하다. 베드로에게 주신 교회의 통치권을 교황이 받았다 주장.
고해성사 제도 실시.
종교재판시작 (중세말 공포의 대상) 대질 신문 없이 형벌 (화형으로 교황이 다 알기 때문에 심문 없이
극형)
「교황은 정신계를 황제는 속권을 하나님께로 받은 것이니 교황과 황제는 대등하다 고 주장」황제권 회복
1296 에 재정한 교직자에게 관세를 금하는 법 반대-금.은 국외로 보내는 것을 금함
프랑스왕 필립4세 교황 보니파시우스는 왕을 출교하려고 아니그니에 있을 때 프랑스왕이 파견한 마병에
게 모욕당하고 포로가 됨. 그 후 석방되었으나 수치당한 분노로 비애하다 벌판에서 화병으로 병사 이로서
로마교황 전성시대 막을 내림
1517 - 1468 웨스트 팔미아 조약체결(130년간 신교와 구교의 전쟁)
마지막 30년 전쟁에서는 하루에 30만명씩 성당 기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학살,
조약체결로 인해 신.구교 동등한 지위와 권위 인정받음
십자군 전쟁
1071 예루살렘 회교도 점령 - 순례하는 기독교인 학대. 약탈 <흉년과 경재불안 현세비관 종교적 위안 찾아 성지순례
열정 (행함으로 죄 사함)대략
서기 400년-약1400년까지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유대인을 하나님을 죽이는 자들이라고 대량 학살 계획을 수립. 사라센
제국 중 터키의 지배를 받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프랑스계 교황 울반2세(Urban)가
1095년 11월 “성지를 이교도 수중에 빼앗긴다는 것은 전 그리스도교의 수욕이며 하나님은 원정을 바란다” 고
역설하자
제1회 십자군이 1096년 3월에 3만명의 병력으로 출발 3년후
1099.6. 7일 낙오되지 않고 입성한 1만2천명이 예루살렘의 거주자를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곳프리가 왕이 됨
제2회 십자군이 1146-1147년에 공격하였으나 1270년까지는 실패로 끝나버림 십자군에 7만의 회교도를 잃은 아랍이
1291년-1491년경까지 또다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기 시작
1066 아랍인이 그라나다에서 4천명 유태인 학살
1290 1.1일 영국에서 그해11.1일까지 추방령 약165.000명
1298 약10만명의 유태인이 프랑코니아 바바라니아에서 살해됨 (마르코폴로 감목서 동방견문록 구술)
1306 9월 10만명의 유태인이 프랑스에서 추방당함
1348 -1349년 흑사병(黑死 Black Death)이 발병,
유태인들의 우물에 독약을 넣어다는 유언비어에 유럽에서 100만명이 학살됨
1492 8월 스페인에선 종교재판으로 30만 명이 추방하고 거절하면 철처녀의 방이라는 사형 장에 집어넣음.
1434 암흑바다정복
1445 베르데곶 정복
1487 폭풍곶(희망봉) 정복
1444 아프리카의 슬픔시작 (노예무역)
※ 편집자 주) 향신료(후추.정향.생강등) ☞13세기중반까지 유럽인은 동양을 가 본적 없고 실크로드를 통해 향신료가 수 입되었다. 서아시아를 차지한 터키 이스람 교도들이 실크로드를 차단(이것을 철의장막)이라함. 엄청난 세금으로 고통 받던 중 칭기즈 칸의 정복으로 길이 뚫렸으나 다시 닫히고 이때 마르코 폴로 1271년부터 24년간 여행한 여행기인 동방견문록을 보고 동쪽으로 가면 인도로 갈 수 있다는 시도를 하게 되고 바스코 다 가마는1497.7.8 리스본출항 1498.8월 인도 캘리커트에 도착 1499.9리스본에 돌아왔을 때는 168명의 선원중 55명만이 생존 3만8천㎞향해함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콜롬부스 또한 인도를 찾아 떠났지만 대서양에서 무역풍을 만나 떠 밀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4천㎞향해 땅을 밟은 쿠바를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인도로 알고 있었고 지금도 지도 표기에는 서인도제도라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은 겨울이 다가오면 수많은 가축을 도축하고(먹이부족) 갈무리하여 봄에 풀이 자라기까지는 썩어가는 고기를 먹어야 했는데 여기에 향신료는 그 들에 삶에 질에 있어서 황금보다 귀한 물건이 되었다.
※ 편집자 주) 죽음(암흑)의바다란☞ 아프리카 서해안 카나리아군도남쪽 툭 튀어나온 보하도르 곶 앞바다를 말함 (그당시 사람은 땅이 수평(직각)인데 그끝의 바다가 암흑의바다로 여겼으며 그 끝의 바다는 폭포처럼 까마득한 어둠(지옥)으로 떨어진다 하여, 근처에도 가질 못함)
1434년 암흑의 바다가 정복되고
1444년엔 아프리카의 검은 슬픔이(노예무역) 시작-
1456 구텐베르그 인쇄술 발명 천주교 반대무릅쓰고
1525신약인쇄후 화형당하 며 마지막 말 "주님 영국왕의 눈을 뜨게 하소서" 순교당함
( 일반인이 성경보는것 금지 어기면 사형,화형당함) 이후
1604년 영국왕 눈이떠져 54명학자를 통해 킹.제임스판.홈정판이
1611완성 지금까지의 세계공통어로 쓰는 영어의 번역서로 남음) 이후 인쇄된 성경을 읽게된 보편적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성경말씀은 모른체 신부님에 강론과 형식위주로 예배를 보던 이들은 말씀 따라 사는 실천 청교도 운동이
일어남
1582 Rhei-ms Douai Catholic Version 역본출판 (외경)구약에 14권더있음
1520 11.28 마젤란 마젤란 해협 빠져나와 태평양 향로 발견
1533 11월 잔인한 피사로 200명 스페인 군대에 잉카멸망
1560 체코에서 3천 유태인 가구 불태움
1648 -1658년 폴란드 러시아 전쟁 중 40만 죽어감
1755 영국의 귀화령.1776 미국독립1791 프랑스 혁명으로 숨통트기 시작
933 유럽 내 유태인인 1600백만 명 증가예루살렘 지배
63-AD395 로마제국
395-638 동로마제국
614-635 페르시야
636-1072 아랍족
1072-1099 터키
1099-1291 십자군
1291-1517 이집트
1517-1917 오토만 터키
1799 나폴레옹 원정
1917-1948 영국지배
1948년 이스라엘건국유태인들은 1933-1945년까지 자신을 죽었다가 살아난 메시야로 믿음 나치즘 정권 S.S 친위대는
악령조직으로 卍는 힌두불교에서 가져온 것 히틀러는 불교의 윤회설을 믿고 가르쳤으며 아리안족의 우수성
주장 학살 동기는 많으나 유태인의「시온의 정서」를 읽고난 후 였다함
1933 3월부터 독일내 유태인 학살
1935 박해 견디다 못해 8천명 집단 자살
1941 6월 스탈린과 조약 깨고 러시아로 진격 러시아내 유태인 학살 폴란드 아유슈비츠 수용소에서만 200만명이
가스실에서 죽어감 같은 유대인 매장부대 손델 코만도 의해 화장되어 버려짐 유럽내 980만 가운데 600만이 전
인구의 60%가 학살당함 많은 수용소에서 의학실험. 새디즘(변태성욕자)을 충족키 위해 마취 없이 생간. 눈 알
을 뽑는 학살 자행
그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리소서 마27:25필사의 탈출 Exodus(엑소더스)각국에서는 쿼터는 엄격하게 유지됨으로 (월남의 보트피플처럼) 미국은
1939년 5월 900명의 입국을 거절 구라파로 귀환되어 학살당함 영국은
1942.2.24 769명을 싣고 팔레스타인에 입국 거절로 배가 침몰 1명 살아남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상해만 비자 없이 입국 가능하여 각국에서 받아들인 수 보다 많음 상해에서 2만5천명 북경
이 5천명 이 입국 살아남음나치지배하의 구라파 유태인은 1/7도 안되는 80만 정도만 탈출시온운동 (레26:44 신
30:3-4 사49:11-12)
1882 의사 레오핀스커는 「자동적 탈출」이라는 저서에서 유태인들이 박해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호소
1894 10월 프랑스 육군 장교 유태계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 독일에 군사정보를 넘겼다고 동료가 계급장 뜯음1906 무죄확정은 됐으나 민족감정 유발- 이 재판과정을 지켜본 비엔나신문사 특파원의 마음속에 「유태인이기 때
문에 받는 천대. 부당함 유태인은 국가를 회복할 권리가 있다」시온의 아버지라 일컫는 데오돌 헤즐1887 8.29 스위스 바젤 197명의 대표가 모여 제1차 시온 개국 운동
유태인의 전통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이 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시오니즘이다.
5년. 그리고 50년후에는 만인이 명백한 사실이다 선언했는데 그의 말대로 50여년 만인
1947.11월 UN은 유태국가 재건을 가결이스라엘 재건이스라엘 건국은
AD 135년 하드리안 황제는 이스라엘 전역 985개 도시를 파괴 58만 명을 학살 예루살렘을 『아에리아 칼피톨리
나』개명후 유대인 추방(Diaspora)후 2000년 만에 돌아오기 시작
1903년 제6회 시온회의시 영국 식민지상 챔벌린은 팔레스틴을 터키가 지배하고 있으니 이스라엘 국가를 아프리카 우간
다로 제공하겠다고 의견제시 영국은
1882년 이집트를 정복
1906년 시나이 요충지를 점령 터키와 긴장은 더해가고 중동의 지배를 꿈꾸던 영국은
1915.10.24 후세인에게 보낸 편지 「맥마흔 각서」8차에 걸친 내용은 아랍인들이 오토만제국에 군사행동을 하면 영국은
아랍국의 건설을 지원 보장 승인할 것이다 이에 아랍은 로렌스(영화-아라비안 로렌스)지도로 시리아 다메섹
에서 터키군 대파했으나 영국은 약속 지키지 않은 가운데
1916.5월 영,프,러 3자 협정이 조인되며 결과 영국의 이중약속이 됨 시오니스트들은 영국의 보장을 받기위해 런던으로
활동무대를 옮겼고 영국은 전쟁비용을 충당키 위해 유태인 로드 챠일드가의 금융지원을 얻고자 팔레스틴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도록 영국은 지원하겠다는 「발포어 선언」을 1917.11.2 로드 챠일드에게 보냄으로 아랍
과 상반되는 이중약속을 하게 됨과 동시 영국은 팔레스틴에 기습공격으로 난생처음으로 비행기(2대)를 본 터
키군은 도망치고 알렌비장군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예루살렘은1506터키 지배 아래 401년만에 무혈 입성 하게
됨,
발포어 선언을 믿고 유태인 3개 대대는 승전하였지만 맥마흔 선언 반발에 부딪쳐 국가재건을 못하고 1918.11.12 1차대전이 끝나고
1920.4.24 산레모 평화회의에서 발포어 선언이 국제적으로 인정 받자 유태인 이주가 시작되면서 지역 곳곳에서 아랍주민
과 충돌 1921.5월 대규모 충돌로 쌍방300여명이 희생되자 각 부락별 비밀안보조직을 구성한 것이 세계 제4의
군사력의 모체인 하가나(Haganah)이다
2차대전시 독일의 연이은 공습 V로케트 탄으로 영국은 대서양을 통한 수송선들은 독일 잠수함 공격으로 영국
은 물자부족과 화약이 없어 전투를 할 수없는 풍전등화의 시점에서
유태인 과학자 챠임 와이즈만이 고구마에
서 아세톤을 축출해 내는데 성공 윈스턴 처칠은 작게는 영국을 크게는 세계평화를 지켰다 소원이 뭐냐? 와이
즈만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준 땅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 처칠은 그 땅에는 전갈밖에는 없는 황폐한 땅이
니 아프리카에 있는 앙골라(우간다)를 줄터이니 이스라엘을 제건하라 하였지만 성경에 기록된 젖과 꿀이 흐
르는 가나안 땅(팔레스탄)은 황량한 벌판의 155마일정도의 강원도 만한 조그만 땅이다.
(편집자주) 유태인 과학자 챠임 와이즈만은 1910년 박테리아를 이용하여 설탕에서 이소아밀알코올[화학식 : CH3(CH3)
CHCH2CH2OH, 이소펜탄올]을 주산물로 뽑아 인조 고무 제조 실험을 하던중 우연히 아세톤과 부탄올의 혼
합물을 얻어다 그 이후 1914년 세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세톤은 전쟁 중에 탄환에 쓰이는 무연 화약
을 만드는데 대량으로 소비됨 세계 2차대전에서도 독일의 대서양 차단으로 군수물자부족으로 (아세톤을 얻
기 위해서는 나무를 밀폐된 용기에 넣고 가열하여 아세트산 증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석회에 통과시키면 아
세트산칼슘이 만들어지고, 연쇄반응으로 아세톤과 탄산칼슘이 최종반응물로 나온다. 대규모 제조를 위해선
역시 대량의 목재를 수입 해야 했다. 하지만 목재를 실은 중립국 함선들은 대서양 해상을 장악하고 있는 독일
의 U-보트 공격으로 차단되자 바이츠만은 또 다시 설탕에서 순수한 아세톤을 얻는 최적의 제법을 찾기에 이
른다. 대량 생산을 위해 증류공장에서 곡물을 이용하여 아세톤을 만드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옥수수의 녹
말을 당으로 변환시켜 대량의 아세톤을 얻어내는 방법을 찾아내었다.[과학도를 위해서 설명하자면, 이는 아
세톤부탄올발효법(acetone-butanol fermentation)라는 것으로, 토양에 있는 혐기성세균인 클로스트리듐
(Clostridium)이 옥수수, 고구마 등의 녹말을 발효시켜 부탄올과 아세톤을 만든다.
이와 같이 영국의 이중약속 배반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두 나라로 분리되고 영국은 쇠락하기 시작하
고 그 쇠락의 욕심으로 중동의 화약고를 창출해냈다.
1848.5.14. P4:30 텔아비브 박물관 홀에서 민족회의(National Council)가 열리고 37명 국민회의 의원들이 서명한 독립선
언문이 낭독, Diaspora
1878년만이요, 시온회의 51년 만이었다.초대 대통령 챠임 와이즈만이스라엘 초대수상 다윗 벤구리온 (20세에 귀환 이스
라엘 군대 조직 리더로 활약)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챠임 와이즈만(Chaim Weizmann)
1925(히브리대학설립)52.11.9일 서거2000년간 원주인 없는 땅에서 살던 원주민(아랍인과 유태인)들은 가자지역으로 밀
려나고 가자지역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만들어 살던 땅을 되찾기 위해 끝없는 분쟁으로 중동의 화약고로
아마겟돈(지구의 최후전쟁)의 시발점을 준비하고.....
이제 인류의 역사는 B.C (Before Christ<그리스도 이전>)에서
A.D.(Anno Domini <우리 주님의시대>)에서 계시록의 시대 그 끝을 향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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