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월남 참전, 전우 선후배님들 - 꼭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너무나 쉽고, 자세하게 - 당시의 상황설명이 잘 된 글이라
일부, 자료 편집 등을 거쳐, 실어 보았습니다.
(글쓴이가 청룡,전우이기에 청룡을 중심으로 글이 쓰여졌음을 참고하시길..)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월남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의 존슨대통령은 한국 정부에 대하여
월남파병을 정식으로 요청한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선뜻 이에 응할 수가 없었다.
6.25 전쟁으로 홍역을 치룬 이 나라, 이제 다시 월남전으로 인하여
우리네 젊은이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그 고뇌의 시간 속에 육영수 여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담배꽁초가
가득 담긴 재떨이를 비워야만 했다.
지난날의 6.25전쟁, 일요일을 기하여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250여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일제히 38선을 넘어왔다.
남침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된다.
그리고 두 달 만에 대구와 부산지역을 제외한 전국토가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백척간두에 처한 대한민국, 그 위기의 순간에서 미국을 선두로 하여,
UN군이 참여하면서 전세를 역전으로 만들어갔다.
이 전쟁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과 밴프리트 장군의 아들과
클라크 UN군 사령관의 아들이 참전하여 모두 목숨을 잃는다.
더하여 4만여 명의 미군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생각해 보면 반만년 역사에 언제나 가난을 당연시하며 살았던 이 나라,
자원도 자본도 기술도 아무것 하나 없던 이 나라,
더욱이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는 -
그나마 미국의 유·무상원조에 의하여 이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파병이라는 국가의 운명을 건 용단을 내린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은 물론 북한보다도 GNP가 낮은 나라였다.
참으로 우리나라는 지금의 아프리카의 빈민국 가나에 비견되는 못사는 나라였다.
돈이 있어야만 이 나라가 잘 살 수 있으련만, 그 어디에서도 비전이 보이지 않는 가난한
이 나라에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나마 이 나라의 국가예산의 반 이상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한 미국의 요청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월남전 파병,
그것은 지난날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자유우방으로 받았던 도움에 대한,
빚을 갚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헐벗은 이 나라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무후무의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또한 주한미군을 월남으로 빼돌리려는 미국 측의 의도를 사전봉쇄시킴으로서,
미군의 철수 후 재 남침을 꿈꾸는 북한의 적화야욕을 꺾는 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당시의 국제역학상, 한반도의 전쟁방지와
세계평화와 자유수호의 기여를 위하여는우리 국군의 월남참전은 필연적이었다.
그것은, 실리와 명분을 갖춘 박정희 대통령으로서의 최상의 결정이었다.
故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의 Seed money로 우리나라를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킨 영웅이다.
그러나, 이제는...
목숨걸고 참전한 우리 전우들의 댓가를, 정상적으로 되돌려 줄 시기가 아닌가...?
1965년 8월 13일,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월남파병동의안을 통과시킨다.
이어서 3일 뒤인 8월 16일,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파월전투사단부대 창설명령을 내리고
채명신 소장을 파월부대 사단장으로 지목 박정희 대통령에게 상신한다.
초대 주월한국군 사령관 겸, 맹호사단장으로서의 채명신 장군은
게릴라 전술의 명장이었다.
그러나 월남전은 그에게도 풀리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았다.
이미 민심이 떠나가고 있는 월남정부, 반면에 그 민심은 민족주의지도자
호치민이 이끄는 월맹으로 향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선이 따로 없는 -
게릴라전을 감당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었다.
채명신 장군도 먼저 이 난제부터 풀어야 했다.
그는 절대자를 의지하고자 했다. 아니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순간 떠오르는 깨달음...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분리와 섬멸이라는 작전개념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유일무이한 채명신 장군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월남전에서 주월한국군사령부가 맨 처음 당면한 과제는 작전지휘권 문제였다.
주월 미군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군을
주월 미군의 작전지휘권 아래 두고 싶어 했다.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작전지위권이란 결국 작전지역의 행사 결정권으로
결코 미국에 양보해서는 아니 된다는 지침을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 보낸다.
이에 채명신 사령관은 미군 지휘관 회의에 참석, 한국군의 입장을 단호히 밝힌다.
우리가 월남 땅을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니고 월남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온 것임을
먼저 월남국민에게 인식시켜야만 하거늘, 한국군의 지위권이 미군에 속하게 되면
우리는 미군의 청부전쟁에 동원된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면서,
이에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정면으로 당당히 소신표명을 하는 것이다.
한편, 해병대 사령관, 공정식 장군은 해병대를 독립부대로 참전하여
미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펼칠 계획 아래,
상륙훈련과 정글전에 대비한 특수훈련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파월전투부대인 해병 제2여단의 이름을 청룡이라고 명명하였다.
호국의 신, 좌청룡 우백호라 하지 않던가. 동방의 상징, 바다의 제왕 청룡...
바다를 주름잡는 군대의 이름으로 이보다 더 근사할 것이 없었다.
우리네 자랑스러운 청룡은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었다.
1965년 9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동해안 기지에서 파월전투부대의 제1진으로 선정된 -
해병 제2여단 결단식에 참석, 유시를 통하여 자유월남을 침략한 공산세력은
월남의 적인 동시에 우리 한국의 적이며 또한 자유세계 공동의 적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또한 월남 전선은 우리의 휴전선과 바로 직결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국가의 현 시점을 인식하고 자유와 평화의 자랑스러운 십자군으로서
해병의 명예를 이역만리에 높이 선양하라고 명령했다.
대통령의 출정명령과 이에 화답하는 청룡부대장의 출정답사에
포항연병장은 한바탕 감격으로 휘몰아쳤다.
이제 청룡은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에 해외 최초의 전투부대로서,
또한 한국군의 선봉군으로서 출정을 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왜 해병대가 해외전투병의 선봉군이 되었는가.
국군 중에서도 해병대는 그 특성이 제반 지상전투훈련은 물론이려니와
상륙작전의 광범위한 수행능력을 갖추고 정규전 및 비정규전의 특수훈련으로
국내외 어느 곳에든지 최단시간 내에 출동할 수 있는 국군전략기동부대의 성격으로 보아
국군이 외국에 파견될 시에는 해병대가 선봉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기정사실인 것이다.
드디어 월남파병, 출정의 그날이 왔다. 1965년 10월 3일 새벽 3시,
해병대 포항 특정지역사령부, 사령관실을 나오는 청룡부대장 이봉출 장군...
지휘관으로서 죽음의 땅을 함께 하는 장병들에 대한 당신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살아서,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그 짧은 한마디,
그것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주는 애틋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전쟁터에서 부대장은 곧 그 부대원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월남출정의 기상나팔이 울리는 새벽녘의 포항사단, 그 연병장은,
밤잠마저 설친 청룡의 뜨거운 열정가가 10월의 싸늘한 밤바람마저 잠재우고 있었다.
청룡들은 일어나자마자 각자 군장을 꾸렸다.
이어서 주먹밥 한 덩이씩을 아침식사로 때웠다.
청룡들을 태운 트럭의 대열이 형산강을 건널 때,
하필이면 먼동이 터오고 있었고, 하필이면
그 시간에 영일만의 밀물이 미명을 가르며 밀려들고 있었다.
잠시 군가가 멎고, 순간 침묵이 흘렀다.
과연 내가 이 형산강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특수전 교육훈련... 땀을 흘린 만큼 피를 흘리지 않는다기에,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하기에,
모두들 그 흔한 요령 하나 피우지 않고 훈련에 임했다.
어찌 청룡이라고 해서 죽음의 두려움이 없었을까.
그들은 그 두려움을 훈련 속에서 악기 가득한 고함으로 이겨내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 편이다. 부처님도 절대 우리 편이다.
해가 떠도 우리 편, 달이 떠도 우리 편... 살아서, 살아서 돌아오리라.
오전 11시, 부산항에 도착한 청룡들의 앞에는
25000톤급 미 해군 수송선 카이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선한 청룡들은 부두에 환송 나온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성은 국방부 장관에게
목이 터져라하고 이기고 돌아 오겠습니다를 몇 번이나 복창하였다.
부산항 제3부두, 마침내 청룡들을 태운 거대한 수송선은,
뱃고동을 몇 차례 길게 울리더니
이별의 서러움도 아랑곳 없이 천천히 부산항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역만리 머나먼 땅, 낯설고 물선 월남 땅으로 그렇게 청룡들은 떠나갔던 것이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의 종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이에 모세는 자기네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는 커다란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다.
저 바다를 건너야만 비로소 애급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거늘,
저 바다를 건너야만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갈 수 있거늘...
흉용하는 파도, 추격해 오는 애급군대, 그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
모세는 지팡이를 들어 바다를 갈랐다. 그리고는 모두 그 바다를 건너갔다.
지난날의 대한민국이 그러했다.
반만년의 농업 국가로 살아오면서 그나마 일제의 치하에 짓밟히고,
6.25전쟁으로 찢겨진 이 나라의 이 민족은
기나긴 세월 오로지 가난을 숙명적으로 여겨왔다.
가난의 강물, 저 강물을 건너야만 비로소 희망과 번영의 땅으로 나아갈 수 있거늘,
그리고 실질적인 주권국가가 당당히 될 수 있거늘...
그러나 자본도 자원도 기술도 그 아무것도 없는 이 나라에 대하여
가난의 강은 이를 건너는 조건으로 죽음을 요구하였다.
과연 이대로 주저앉아야만 하는가. 어떻게 해서라도 건너야 할 강이었고
언젠가는 건너야만 할 강이었고 누군가는 꼭 건너야할 강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심정에서 마침내 꽃 같은 우리네 배달의 아들들이 목숨을 걸고
그 강에 뛰어들어 인간가교를 놓기 시작했다.
연인원 32만명, 무려 10여년에 걸쳐 만든 대장정,
그로 인해 우리네 배달의 아들들은 전사 5.000여명,
전상 16.000여명으로 고귀한 희생을 치루었다.
그 희생의 댓가 속에, 대한민국은 한 많은 가난의 강을 비로소 건너갔던 것이다.
실로 모세의 기적을 대신하여 파월용사들이 온몸을 바친 것이다.
월남 파병 환송식에서 이광재 아나운서는
“국가의 명예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는
저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대한 건아들의 모습을 보라” 며 마침내
주체할 수 없는 감격 속에 흐느끼며 중계방송을 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죄인 것인가?
그러나 조국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죽음의 땅으로 의연하게 향해 가는 파월의 용사들...
그 비통함, 그 의연함, 그 충성심,
그것은 정녕 민족웅비의 한판 승부사를 건 비장하고도 찬란한 행진이었다.
과연 파월용사들의 충정어린 희생은 지난날 한국 전쟁 때 우방에 대한 빚을 일거에
갚는 것이 되었고,또한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의 튼튼한 초석이 되어 주었으니,
어찌 세월이 간다고 그 빛나는 업적을 잊을 수가 있으랴.
미국의 파병요청에 한국의 요구사항을 따른다는 브라운 각서...
그것은 파월 용사들의 피를 대신하는 희생의 대가였다.
이 각서에 따르면, 미국은 월남 파병에 따른 장비와 각종 경비를 한국군에 제공하고,
파월 장병들의 급여도 지불하며 주월 한국군의 구매하는 물건도 최대한 국내에서 조달해야 한다.
주월 미군과 월남군이 미국 국제 개발처(AID)가 월남에서 실시하는 농촌건설 등의 사업에
필요한 물품을 한국에서 많이 구매하며, 한국의 수출진흥을 위한
기술 원조를 강화한다. 등등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월남파병으로 인하여 신의를 아는 나라,
빚을 갚는 나라로 각인되면서 국제적인 신인도는 높아만 갔다.
그동안 돈 빌려주기를 외면하던 선진국들이었건만,
이제는 한국에게 서로 돈을 빌려주려고 하였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외자도입액만도 33억 달러에 달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월남전 참전 9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받는 해외근무 수당 및 전투수당등..
국가의 경제개발에 전용된 사실에 관하여 _
이제는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 된 이상, 제반 생명수당을 참전 전우들에게
환급해야 된다는 외침이 점차 불거지고 있다.
※ 프레이져 보고서와 브라운 각서의 숨겨졌던 진실이 현재(2019년),
쟁점으로 재 부각,,, 논란中에 있다.
월남전 참전대가로 얻은 월남특수로 수출과 군납, 용역 및 건설로 민간 파월 기술자가
국내로 송금한 간접수입액이 무려 7억여 달러로서 국내 총 외화획득의 80%를 차지했다.
이것은 한국군이 월남 8개 항만 가운데 5개 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월남의 주요공사는 주로 한국이 도맡다시피 한 결과였다.
하역과 운수 분야에 진출한 한진 상사는
67년 월남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회사라고 뽑혔다.
한진 상사의 이해 용역실적은 2천5백만 달러로서
다른 모든 회사들의 용역을 합쳐 놓은 것보다도 많았다.
이와 같이 돈을 번 한진 상사는 장차 대한항공을 인수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건설 또한 월남특수를 토대로 베트남에 진출, 세탁업과 준설공사를 벌였다.
그 당시 현대건설은 일본에서 준설선을 한 대 사들이고 부산과 인천에서
기능공들을 모집, 캄란 항 미군기지 건설의 준설공사에 투입했다.
외국회사들이 완공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 위험한 지역을 맡아
공기 이전에 끝냄으로써 미군 측의 신뢰를 얻은 현대는 메콩강 오지의 빈롱항 준설공사,
미토항과 붕타우항만 준설공사도 따내면서
경험과 기술을 축적, 오늘날 세계적인 유수의 기업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 한국의 월남파병으로 -
미국과는 최고수준의 외교관계가 수립되면서 대미수출액도 급증했다.
1964년에 3천6백만 달러이던 것이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2천120달러로 28배나 되었기 때문이다.
외환보유액도 1964년도에는 겨우 1억2천8백만이던 것이-
1978년도에는 무려 40배에 해당하는 49억 4천만 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의 1인당 GNP는 1964년 103달러로서 북한보다 적었던 것이
1975년에는 북한의 1.4배, 박대통령께서 서거한 1979년에는 무려 12.8배로
북한을 능가하면서 연평균 12%의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경제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월남파병으로 기인한 경제적 이득은
적어도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는 그동안 일본과의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6년 6월 3일 얻어낸 대일청구권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고속도로,
발전소, 제철공장 등 대규모 인프라를 구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를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어느새 기능공의 나라가 되었다.
월남전은 엄청난 인명피해도 자아냈지만, 한편으로는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면서
월남 파병의 특혜 속에 진출한 한국인들과 한국기업은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했다.
실전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런 자신감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1970년도의 한국인들은 중동건설 시장 등 세계로 뻗어나가
민족의 활동공간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정녕 월남체험은 한국남성들에게 최초의 집단적 국제화 경험이었다.
월남 파병은 우리네 과거의 중국, 일본, 미군정의 지배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잠재하던 열등의식, 피지배 의식을 박차게 해주었고,
스스로의 자질에 눈뜨고 자부심을 가지게 해준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현대사에 신기원을 이룩한 정신적으로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실로,우리의 월남파병은,
가난에 허덕이는 이 나라를 번영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그 주인공인 파월용사들은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친 구국의 아들로서
정녕 이 나라의 경제부흥과 조국근대화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글 : 옮겨와 글 일부 수정 및 전체 재편집)
원글 : 와당카 / 이유있는 파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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