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모두 이 사실을 자식들에게
교육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위의 가사와 악보는 박두진이 쓰고, 김동진이 곡을 붙인 ‘6.25의 노래’다.
초등생~ 30/40대 까지 잘 모르는 6.25노래
초등학교(初等學校)에 다닐 때에 입에 달고 다녔던 '국민가요(國民歌謠)'이기도 했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이런 노래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노래’뿐만 아니라 ‘6.25’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일본(日本)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전쟁, 혹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혼동하는 어린이들도 적지않다. .
북한군의 서울 침공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더구나 현재의 초등학교(初等學校) 교과서에서 ‘6.25’는 스치는 이야기 정도로 두 세군 데에 나올 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6.25의 노래’는 너무나 생소(生疎)하고 이해하기 힘든 노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의 60대 이상 세대들은 해마다 6월이 오면 이 ‘6.25의 노래’를 너무나도 열심히 불렀다. 아이들의 고무줄놀이에도 써먹고, 나뭇길에 지게목발을 치면서 목이 터져라 부르기도 했다. ‘니나노집’에서 노래 밑천이 짧거나 떨어지면 대신 부르는 애창곡(愛唱曲)이 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교련선생(敎鍊先生)님은 매 구절 앞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어 부르라며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그렇잖아도 이 노래는 애당초 악을 쓰고 부르기에 딱 알맞은 노랫말과 곡조(曲調)를 갖추고 있어 제식훈련(制式訓練)으로 다리 아프고 배고프면 선생님의 호통이 아니더라도 지레 악을 쓰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새, 이 나라에서 ‘조국(祖國)’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원수(怨讐)’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이뿐인가. 저들 침략군들의 딸들이 남쪽으로 무슨 응원이라도 오면 그 미끈한 매력과 기계화된 동작에 매료되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며칠씩 그녀들의 숙소와 응원석을 맴돌기도 한다.
북한 여자 응원단
(일부 국민들은 이들이 한 번씩 나타나면, 보고싶어 사족을 쓰지 못하고 안달이 난다)
북한(北韓)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일컬어 반드시 ‘조국(祖國)’이라는 호칭을 쓴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 ‘조국’이라는 말을 쓰면 훨씬 다정해진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는 무슨 대화에서든 '조국(祖國)'이라는 말이 튀어 나오면 '촌놈'취급을 받지 않으면, '덜 떨어진 인간' 취급을 받는다. 음담패설(淫談悖說)을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이나, 반어적(反語的) 의미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투를 몇 번 섞어 넣어야 지성인(知性人) 취급을 받을 수 있는 반면, 무심결에라도 '조국'이니 '애국'이니 하는 용어를 쓰면 '구닥다리'나 전근대적(前近代的)인 퇴물로 매도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다 북한군(北韓軍)의 6.25남침(南侵)을 듣도 보도 못한 일부 운동권(運動圈)에서는 그 전쟁에서 죽다가 살아난 세대가 눈을 부릅뜨고 고통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엄연한 '남침'을 한사코 '북침(北侵)'이라고 집을 부리고 있다.
북한군 서울침공 장면
(6.25가 '북침'이면 왜 이들이 3일만에 서울 태평로까지 왔을까?) 어쨌든 한반도의 남쪽에서 사라진 ‘조국(祖國)’이 그나마 북쪽 땅에서 위력(偉力)을 발휘하고 있으니 다행이랄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금의 ‘6.25의 노래’는 차라리 북한(北韓) 어린이들이 불러야 할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도 북한은 6.25전쟁을 ‘북침(北侵)’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군에 의해 '인민의용군'으로 징집된 서울시민들
(우리가 '북침'을 했다면, 어떻게 서울시민들이 미제 'M1소총'이 아닌 소련제 '장총' 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할까?. 소련에서 우리에게 무기 지원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어쨌든 ‘6.25의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사실상(事實上) 잊혀진 노래가 되고 있다. ‘민족공조(民族共助)’라는 큰 물살 때문이다.
어느 해이던가, 국방부(國防部)가 제작한 포스터에 국군과 북한의 인민군(人民軍)이 형제처럼 나란히 다정하게 그려져 있어서 말썽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원수(怨讐)’와 ‘적군(敵軍)’이 어느 한 순간 그림 한 장으로 ‘친구’와 ‘형제’가 되어버렸던 이 해프닝도 ‘민족공조’의 큰 그림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6.25의 노래를 두고 그 가사가 초·중등(初中等)학생들이 부르기에는 너무 섬뜩하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필자가 생각해도 가사가 너무 극단적(極端的)인 용어로 구성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를 함께 나눈 동족으로서 평화로운 이 나라를 침공하여 100만명이 넘는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저들은 '원수'일 수밖에 없었고, "쳐서 무찔러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었다.
사정이 이러했는데도 지금 세대들은 그 노래가 대단한 오류(誤謬)라도 있는 양 비난일색(非難一色)이다. 이뿐이 아니다. 이 노래의 근원인 '6.25동란' 자체를 마치 없었던 일이거나, 우리 쪽이 뭔가를 잘못해서 일어난 사단이나 되는 것처럼 슬그머니 교과서(敎科書)에서도 지우고, 노래책에서도 지우고 있다.
털끝만큼도 본받을 일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일본인(日本人)과 일본정부의 근성(根性) 이라도 닮았으면 한다. 63년전 순박하기 짝이 없는 우리나라 어버이들과 어린 여성들을 보국대(報國隊)와 정신대로 끌어다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만행을 저지른 일제(日帝) 출신 일본정부 관리들은 지금도 그때의 그것은 만행(蠻行)이 아니었다는 책을 만들어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세뇌교육(洗腦敎育)을 시키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그들보다 5년이나 뒤인 1950년, 평화로운 일요일을 즐기던 우리들의 머리위에 포탄과 폭탄(爆彈)을 쏟아 부어 100만명이 넘는 무고한 우리 국민들을 살상(殺傷)한 북한공산주의자(北韓共産主義者)들의 만행과 '6.25동란'의 참상(慘狀)은 무슨 창피한 일이라도 되는 양 쉬쉬하고 감추려고만 하고 있다.
북진하는 국군
(얼어붙은 한탄강을 건넌 이들은 절반도 살아오지 못했다) 공산군은 후퇴를 하면서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신앙인 등을 무차별 학살한 뒤 식수원도 끊을 겸 우물에 던졌다
공산군에게 학살 당한 시체 가운데 남편을 찾고 있는 부인. 뒷줄엔 처리반원들이 악취로 인하여 코를 막고 있다.
시체가운데 가족을 찾는 생존가족들의 표정이 담담하다. 이래서는 안된다. 노래의 가사가 지금의 국민정서(國民情緖)에 맞지 않는다면, 그에 맞춰 개사(改詞)를 하면 된다. 그리고 그 개사된 '6.25노래'로 '6.25의 원혼'들을 달래줘야 한다.
가해자(加害者)의 눈치를 보느라 비굴하게 몸을 움츠리지 말고, 100만명의 원혼(?魂)들에게 제사(6.25 기념행사)라도 제대로 드려줘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와 못난 후대(後代)들이 '6.25숨기기'에 급급하고 있는 몰골이 너무나 한심하여 한 작가(作家)가 기존의 ‘6.25의 노래’를 개사(改詞)하여 ‘신 6.25 노래’라는 것을 지어 발표한바 있어 이를 소개한다. 지금의 ‘6.25 노래’가 학생들의 정서(情緖)에 맞지 않는다면, 자기가 지은 노래로라도 그 당시 희생된 원혼(冤魂)을 달래주자는 취지에서 지은 시라고 한다.
6.25 전상자
‘6.25전쟁’으로 인해 우리 국군(國軍)의 사망자는 무려 137,899명에 이르며, 실종자(失踪者) 수는 32,838명이나 된다.
부상을 당한 국군도 450,742명에 이르고 있다. 민간인(民間人)들의 사망자는 학살당한 사람까지 합쳐서 37만여 명에 이르며, 부상당한 사람도 23만여 명에 이른다는 통계다. 여기에다 피난민(避難民)이 240만여 명, 전쟁고아가 10만여 명이나 발생했다.
생떼 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가 20만여 가정, 청상과부도 20여만명이나 발생했다. 부상자도 그냥 부상자가 아니다. 팔과 다리를 잃고, 악성 총상으로 신음하다가 조금 남은 논밭전지마저 모두 탕진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전쟁고아
(부모는 모두 살륙당하고 병든 개처럼 버려져 있다. 이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미국(美國)을 포함한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자가 3만6천9백여 명이고, 11만6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실종(失踪)되거나 포로가 된 병사들이 6,900여명에 이르고 있다.
북한군(北韓軍)과 중공군에 비하면 유엔군의 희생은 적은 규모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은 북한군과 중공군(中共軍) 같이 남의 나라를 침략(侵略)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저들의 침략을 막아 우리나라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소중(所重)한 목숨을 빼앗긴 것이다.
중공군에 생포되는 유엔군
6.25 동란에 따른 양측 피해
※ 북한군의 전사/사망자에는 그들이 학살한 북한동포를 포함한 수이며, 실종/포로는 그들이 납치하였거나, 행방불명이 된 자를 포함하고 있음
유엔군 측 국가별 사상자
남침 중 중앙청을 점령하고 춤을 추는 중공군들
(아직도 6.25를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운동권에서는 이들 중공군들이 그 먼 중국땅에서 왜 우리의 수도 '서울'까지 와 있으며, 무엇이 좋아 춤을 추고 있는지를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개미떼 같이 기어 올라오는 적병(敵兵)들 앞에서 "소대장님! 총알이 안나가요"라며 울부짖다가 처참하게 쓰러져간 그들 무지렁이 소총병(小銃兵)들의 절규가 '조국'과 우리들 후대들에게 이웃집 강아지 죽은 것보다 못한 이 따위 '홀대'를 자청(自請)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속 깊이 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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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을 잊이말자> 그러나 이땅에서 꽃다운 삶을 마감한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를 추모하면서 정리한 자료 입니다. 1. 파리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 파리 세느강 마레다리 근처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기념비 2. 호주캔버라 Korean War Memorial, Canberra 한국전쟁 가평전투에 참가한 호주군인들
3. 캐나다 *- 한국전쟁기념비 -*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링컨기념관 인근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 (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의 기념 조형물은 미국 성조기를 향해서 우비를 입은 한 소대가 전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각상 양쪽으로 서 있는 벽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2, 500명의 얼굴들이 레이저로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 150만 명이 참전하여 5만 4000명이 사망하고 11만 명이 잡히거나 부상당했으며, 8, 000명이 실종되었다. 가운데 게양되어 있는! 성조기 아래에는 "조국은 그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응한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라고 적혀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는 장소가 뉴욕 맨하탄의 최남단 배터리 파크 내에 있다. 배터리 파크 내에는 수많은 기념물과 기념탑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이 군인 형상의 구멍 뚫린 조각물이다. 이것이 바로 6. 미국 Connecticut (컨네티컷) West Haven의 7. 미국 Atlantic City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8. 미국 Staten Island에 위치한 9. 보스톤의 한국전쟁기념비 ☞ Korean War Veterans of Massachusetts, Charlestown Navy Yard 출처: 오니온맵 플로그 찰리의 사진첩 10.남아공의 11.터키 한국전쟁 참전기념탑 한국전쟁 참전 토이기(터키)기념탑에 있는 참전 희생자 명단 터키 수도 앙카라 한국 공원에 있는 높이 9m의 4층짜리 ‘한국전쟁 참전토이기(터키)기념탑’ 서울-앙카라 자매결연을 계기로 1973년 11월, 1년여간 시공을 거쳐 세워진 탑이다. 12.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촌(한국마을)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유엔군의 일원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에티오피아군은 화천, 금화, 양구, 철원 등 강원도의 최전방지역에서 공산침략군과 싸웠다. 한국전 참전 16개국 중 유일하게 포로가 없을 정도로 에티오피아군은 가장 용맹스러운 군대였다고 한다. 춘천시는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아픈쵸베르 공원에 참전용사회관과 기념탑을 건립했다 1. 유엔군 초전기념비(경기 오산시) 유엔군 참전기념비는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1950년 7월 5일 미군 제 24사단 소속 제21보병부대 및 제 52 야포대대 소속 1개 중대로 편성된 스미스 전투부대 406명의 장병이 북한과의 최초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1955년 7월 5일 미군 제 24단과 장병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2.UN묘지 (부산시 대연동) 남구 대연동 779번지 일대의 면적 144, 146㎡로 유엔 묘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도발에 의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16개국의 전투지원국과 5개국의 의료지원국의 유엔군 장병의 전사한 영령을 안치한 곳이다. 1951년 1월 18일에 묘지를 조성 설치하고, 1955년 11월 15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에서 오직 하나 뿐인 유엔 관리의 묘지로, 1959년 유엔과 우리정부 사이에 묘지의 영구적인 관리 및 사용을 위한 협정이 성립되었으며, 1974년에는 관리권이 영령을 안치한 참전국 11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기념관리위원회에 이관되었다. 현재 이곳에 안치된 영령은 영국 884, 터어키 462, 캐나다 378, 오스트레일리아 281, 네델란드 117, 프랑스 44, 뉴우질랜드 34, 미국 19, 남아프리카공화국 11, 노르웨이 1, 한국 36, 무명용사 4, 비전투원 11기로서 총 2, 282기가 안치되어 있다. 처음 이곳에 묘지가 설치될 때 묘의 수는 미국 등 16개국 11, 000기 이었으나 이디오피아, 태국, 그리이스,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등 5개국 전몰장병 묘를 이곳에서 본국으로 이장해 갔기 때문에 현재의 기수(基數)로 줄었다. ![]() ▲ 묘역내 기념관 내부 ▲ 3.유엔군 참전기념비 높이 12.05m, 16개의 기둥으로 탑신을 이루고, 기둥의 중간부분에 각국 의 특색을 살린 군인상을 청동으로 조각해 붙였으며, 기둥끝에 각국의 국기를 게양토록 했다. 세계유일의 유엔군 묘지인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건립된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APEC정상회의 참석차 부산을 찾은 뉴질랜드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가졌다. 4.한국전쟁 유엔군 자격 참전국 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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