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인물

고 정주영 회장의 사업 마인드

리멘시타 2013. 3. 8. 13:51

 

 

                                           

 


  1975년 여름 어느 날,

 박 정희 대통령이 현대건설의 정 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렀다.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십시오.

 만약 정 사장도 안 된다고 하면 나도 포기(抛棄)하지요.”

 정 회장이 물었다. “무슨 얘기입니까?”

 '1973년도 석유파동으로 지금 중동국가들은 달러를 주체하지 못 하는데
그 돈으로 여러 가지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은데,

 너무 더운 나라라 선뜻 일하러 가는 나라가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 일할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관리들을 보냈더니, 2주 만에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이 없어

 공사를 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래요, 오늘 당장 떠나겠습니다.”

 정 주영 회장은 5일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박 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요?”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입니다.”

 “뭐요!”
“1년 12달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내내 공사를 할 수 있고요.”

또 뭐요?”

“건설에 필요한 모래,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고요”

 
“물은?”

 그거야 어디서 실어오면 되고요.”

 50도나 되는 더위는?”

 천막을 치고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되고요.“

 박 대통령은 부자를 눌러 비서실장을 불렀다.

 '임자, 현대건설이 중동에 나가는 데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와줘!”

 정 회장 말대로 한국 사람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을 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그 시절,

 30만 명의 일꾼들이 중동으로 몰려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싣고 들어왔다.

 

 

 


1975년 여름 어느 날,

 박 정희 대통령이 현대건설의 정 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렀다.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십시오.

 만약 정 사장도 안 된다고 하면 나도 포기(抛棄)하지요.”

 정 회장이 물었다. “무슨 얘기입니까?”

 '1973년도 석유파동으로 지금 중동국가들은 달러를 주체하지 못 하는데
그 돈으로 여러 가지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은데,

 너무 더운 나라라 선뜻 일하러 가는 나라가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 일할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관리들을 보냈더니, 2주 만에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이 없어

 공사를 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래요, 오늘 당장 떠나겠습니다.”

 정 주영 회장은 5일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박 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요?”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입니다.”

 “뭐요!”
“1년 12달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내내 공사를 할 수 있고요.”

또 뭐요?”

“건설에 필요한 모래,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고요”

 
“물은?”

 그거야 어디서 실어오면 되고요.”

 50도나 되는 더위는?”

 천막을 치고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되고요.“

 박 대통령은 부자를 눌러 비서실장을 불렀다.

 '임자, 현대건설이 중동에 나가는 데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와줘!”

 정 회장 말대로 한국 사람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을 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그 시절,

 30만 명의 일꾼들이 중동으로 몰려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싣고 들어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업무담당 상무 출신으로 10여년간 정 명예회장의

                                                통역을 담당했던 박정웅씨의 글

(1982년-1984년 3년간 대한체육회장, KOC위원장, 국민체육진흥재단이사장 들을 역임하신 정주영 회장<우측>, 하진량 중국 IOC부위원장, 통역 중인 필자<가운데>)


 

(IOC역사 상 최고의 실력자, 실권자였던 철의 여인 Monique Berlioux IOC사무총장<좌측>이 무교동 체육회관 KOC위원장 집무실에서 정주영 KOC위원장과의 면담 후 IOC기념품을 전달하고 있다. 가운데가 통역을 맡은 필자)



 

(1983년 고 김택수 IOC위원 올림픽훈장 추서식 참석 및 1988년 서울울림픽 준비상황 점검차 무교동 KOC를 방문한 사마란치 IOC위원장<가운데>과 정주영 KOC위원장<우측>과의 면담에 참석한 노태우 SLOOC위원장<맨좌측>과 이영호 체육부장관<사진좌측 옆모습만 보인다. 사마란치 IOC위원장에게 설명 중인 필자<사마란치와 정주영회장 사이>


 

(1984년 OCA 서울총회시/고 Sheikh Fahad OCA회장 겸 쿠웨이트 IOC위원/왕족인 그는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시 교전 중 사망하였다. 정주영 KOC위원장은 OCA총회 개최국 NOC위원장으로서 OCA총회 후 기자회견에 참석 중이다. 필자는 정회장의 단골 통역이었다.)



(고 Sheikh Fahad OCA회장은 1982년 12월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기간 중 그 전까지 아시안 게임 총괄 연합회였던 AGF<Asian Games Federation>을 해체하면서 OCA<Olympic Council of Asia>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에 취임하였다. 정주영KOC위원장은 OCA무대에서 KOC의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하여 Sheikh Fahad OCA회장과 스포츠외교 협력을 돈독히 하였다.)  


(정주영 KOC위원장은 OCA와의 협력강화 포석으로 쿠웨이트 NOC위원장 직도 맡았던 Sheikh Fahad OCA회장과 한국-쿠웨이트 NOC스포츠교류협정을 서울에서 체결하였다./정회장 우측이 최만립 KOC부위원장 겸 명예총무, 뒷줄 우로부터  김집 대한체육회 부회장<체육부장관 역임>, 이태근 KOC 전문위원<가려짐>, 장충식 단국대학교총장 겸 KOC부위원장 겸 KUSB위원장, 김성규 국제국장, 필자) 




(1984년 OCA서울총회 후 합동기자회견 시 함께 자리한 정주영KOC위원장과 고 이영호 체육부장관<우측>/아타깝게도 두 분의 가치관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1984년 LA올림픽 이후 정주영회장은 KOC위원장 직에서 자의반 타의반 사퇴하였다.) 


(1984년 LA올림픽 한국선수단숙소였던 USC대학 올림픽선수촌 식당에서 한국 선수 및 임원들과 식사후 담소를 나누고 있다.)


(1988년 서울울림픽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무려 40여 차례 한국을 방문하였다. 매번 방한 때 마다 서울올림픽개최국 NOC인 KOC를 방문하여 KOC의 위상을 높혀 주었다. 1983년 당시 무교동 체육회관 8층에 위치한 KOC위원장 원탁회의실 겸 접견실에는 수 많은 IOC위원들과 아프리카 체육부차관 들 그리고 전 세계 스포츠 지도자들이 줄지어 방한하여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위 사진을 보면 사마란치IOC위원장<앞줄 좌-2>과 Sheikh Fahad OCA회장<뒷편 우-3>등이 동시에 방한하였다. 이 경우 정주영 KOC위원장이 Host로서 영접하고 환담의 주체가 되었다./좌로부터 통역 중인 필자, 사마란치, 노태우 SLOOC위원장. 이영호 체육부장관, 최만립 KOC명예총무, Allen Coupat IOC위원장 비서실장, Sheikh Fahad, Shara Chandra Shah 네팔 NOC위원장, 김집 당시 대한체육회 부회장, 김세원 KOC부위원장, 조상호 SLOOC부위원장, 이원경 체육부장관<가려짐>, 정주영 KOC위원장<가려짐>/전체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화기발발하다.) 


(정주영 KOC위원장이 대한체육회장을 떠나고 몇 년뒤인 1988년 무렵 체육관련 한 리셉션장에서 반갑게 해후 하였다./좌로부터 전상진 SLOOC국제사무차장/전임 외무부대사, 필자, 정주영 왕회장, 이원웅 KOC전문위원)




(1981년 9월30일 당시 서독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쎄울"<서울>이 1988년 제24회 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되고 나서 KOC위원장으로 선출된 왕회장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올림픽 준비상황을 살펴 보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기적 현장을 견학하기 위해 수 많은 전 세계 스포츠지도자들의 방한러시가 있었다. 1983년 방한 한 당시 파라과이 NOC위원장 과 사무총장이 정주영KOC위원장을 예방하고 울산에 있는 현대중공업 공장단지를 방문하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끝없는 도전정신 '맨손의 신화'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잠언 12:24).

이미 고인이 된 ‘맨손 신화’의 주인공 정주영씨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극을 달린다.
조국근대화를 이룩한 위대한 경영인에서부터 개발독재시대에 성장한 재벌이란 평가에 이르기까지 보는 시각에 따라 긍정과 부정으로 엇갈린다. 그러나 같은 ‘재벌’이라 해도 정주영은 이병철과는 분명히 다르다.

후자가 ‘만석꾼 가문’ 출신이라면 정주영은 그야말로 ‘농부의 아들’이었다. 이병철의 점퍼입은 모습은 어울리지 않지만 정주영의 점퍼차림은 어색하지 않다. 그는 누군가가 얘기했던 ‘보통사람’ 이었기 때문이다.

소년 정주영은 아버지 몰래 소를 팔아 마련한 70원으로 ‘깡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쌀집 종업원으로 시작한 정주영은 오늘의 현대가를 탄생케 했다.

정주영의 성공 이야기는 보통사람의 성공 이야기인 셈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잔디를 벼모종으로 대체한 일화는 그의 ‘무모한’ 도전정신을 보여준다. 주베일 산업항의 건설, 불가능하다고 얘기했던 현대조선소 건설, 포니의 신화, 나아가 소떼몰이 방북까지 그의 도전정신은 고희를 넘긴 나이까지 계속됐다.

2001년 노환으로 세상과 등지기 전까지 그는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 그의 도전은 무모하기보다 확고한 신념 속에서 이뤄진 도전이었고, 보통사람의 도전이었고, 노동자의 도전이었다. 그러기에 훨씬 값진 도전이었다.

“나는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라는 그의 말은 겸손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과 경영철학을 보여주는 말이다.

대기업 중에 하나인 현대를 세운 사람은 농부의 아들인 정주영이다. 정주영이 자신의 꿈인 사업가로써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정주영은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요소인 사람과의 신용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꿈은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다. 뭐든지 자신의 꿈을 이루려면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나 역시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나의 노력과 끈기, 부지런함이 갖춰져야 한다. 이것이 나중에 정주영처럼 나의 꿈의 밑바탕과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주영은 언제나 자신의 노력과 끈기, 부지런함, 신용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성공시켰다. 그렇다면 정주영이 어떻게 사업가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지 알아보자.

 

자신의 신념과 노력, 신용만을 믿고 꿈을 키우기 위해 가출을 시도한 정주영은 가난에서 벗어나고 사업가로서의 원대한 꿈을 이륙하려는 큰 꿈이 있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기 위해 가출을 하여 서울에서 오직 끈기와 부지런함으로 버텼다. 오직 신용으로 돈을 빌렸으며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현대는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이것이 뛰어난 아이디어와 생각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신용과 현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가 주목의 대상이 되자, 정주영은 조국 근대화의 주역으로 나섰다. 시멘트 공장을 세워 조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 현대건설이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하자, 정주영은 이제 해외로 눈을 돌렸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이 초 일류 기업이 되기 위한 길이라고 느낀 것이다. 현대는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태국에 진출하였으나 손해를 보았다. 아직 세계진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용을 쌓게 해주어 여러 나라에서 공사를 해달라고 신청하게 되었다.


 

박정희대통령 때에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되었다. 항상 꼼꼼히 시간을 절약하면서 공사를 하는 정주영의 방법은 여러 나라와 사람들에게 신용을 주게 된다. 신용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므로 정주영은 어느새 세계 일류 기업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주영이 재벌형성에 막강한 힘을 얻게 된 일은 바로 조선소를 세우는 일이었다. 정주영은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조그마한 배를 얻어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조선소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조선소를 세우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 현대도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정주영이 가진 신용을 다시 한번 발휘하여야 할 때였다. 정주영은 세계에서 돈을 꾸기 위해 사방팔방을 다녔다.

여러 나라에서 거절이 되풀이 되었다. 그때 정주영에게 리바노스 라는 그리스인이 배 두 척을 주문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에서 돈을 지원하게 해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조선소를 만들면서 어떻게 수주 받은 배 두 척을 만들겠냐며 큰 소리를 쳤지만 정주영은 모든 것을 같이 하는 방법으로 조선소와 배 두 척을 한번에 만들어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신념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현대의 작품이었다. 조선소는 현대가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도록 도와주는 든든한 밑 밭침이 되었다.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오일쇼크가 일어나면서 현대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현대의 정주영은 돈이 모이는 산유국으로 진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산유국에는 대 기업과 강대국들의 차지로 자리가 한 자리밖에 없었다. 여기서 현대의 기동성이 발휘하면서 겨우 마지막 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제 무조건 수주를 따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른 강대국들과의 경쟁에서 무조건 수주를 따내야만 했는데 이를 가지고 정주영과 부하 직원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현대건설의 상무는 정주영의 선택을 저버리고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현대의 승리였다. 현대건설의 상무의 선택이 옳았던 것이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강대국의 방해작전이나 루츠 사의 공사 지연도 그때 마다 나오는 기회와 신념으로 어려운 난관들을 해쳐나갔다. 공사는 성공적이었고, 선진국 사람들은 정주영을 ‘불가능을 모르는 사람’이라 불렀다. 정주영은 건설업을 안정된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예전에 꿈이 두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현대를 초일류그룹으로 만드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정주영은 국민 차인 포니를 만들었다. 옛날에 정주영이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이후로 자동차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서 일수도 있다. 정주영이 국민 차 포니를 생산하면서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은 크게 발전하게 된다.


 

정주영은 말년의 계획을 크게 그렸다. 자동차, 대북 사업, 사회복지 사업이었다. 자동차 산업은 매우 전망이 좋았다. 외상도 안하고 현금으로 지불 받아 기업이나 국가에 이익이 되는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주영은 전자산업에 투자해 세계의 흐름에 발맞추어 발전했다. 그러나 정주영의 발목을 잡은 것이 있으니, 바로 한국의 정치였다. 정부는 정주영에게 올림픽을 유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정주영은 꼼짝없이 성공적으로 일을 진행시키고 말았다.


 

정주영은 정부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유치를 성공시키자마자 전국지도를 바꾸는 유조선을 이용한 물막이 공사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주영은 소련이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고는 북한을 방문했다. 정주영은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이에 대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정주영은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정주영은 결국 정치에 미련을 버리고 북한과의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 금강산 관광사업을 벌였다. 정주영은 북한과 통일을 하기 위해 통일을 밑거름을 뿌렸다. 바로 소떼를 자신의 고향으로 끌고 북한으로 간 것이다. 그는 청년 때, 소를 팔은 돈 70원을 가지고 가출했을 때의 빚을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 정주영은 빚을 갚으러 북한으로 간 것이다.


 

정주영은 이제 마지막 소원을 끝까지 이루기 위해 아산재단을 설립하고 나라를 위해 자선했다. 정주영은 자신이 나라에서 받은 것을 다시 되돌려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농촌에서 태어난 한국의 별 정주영은 대북사업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눈을 감고 말았다.


 

나는 정주영의 일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정주영은 어릴 때부터 이미 자신의 꿈을 실행에 옮겼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꿈을 어떻게 설계하고 실천할지 몰라 우왕좌왕 할지도 모른다. 정주영은 결과를 걱정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나의 신념을 믿을 줄 알아야겠고 나의 원대한 꿈을 항상 설계해 나아가야겠다.’라고 깨달았다. 불가능을 확인하기 전에 실천해보자. 나의 신념을 믿고 언제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J에게 / 트럼펫 연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