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인물

조폭- 완전해부(100년의 역사)

리멘시타 2013. 1. 7. 07:50

 

 

                                     

                             내용은 스크랩자료입니다
  깡패와 건달로 본 100년의 역사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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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은 1999년 제작된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라는
MBC 다큐 시리즈 中 2부작으로 기획된 깡패와 건달로 본 100년'이다.
본 다큐는 지난 100년간 한반도에 존재했던 조직폭력배들의 역사를 돌이켜
봄으로써 그들의 변천과 변치않은 생리에 대해 다루면서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구한 말부터 5.16 이후의 3세대 조직범죄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격동의 20C를 보낸 한반도, 그곳에서 조직폭력은 과연 어떻게 성장해 나갔을까? 


구한말에도 조직화된 폭력이 존재했을까?
놀랍게도 당시조차 정부의 허가를 등에 업고 많은 무뢰배들이 조직화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강을 건너는 이들에게 세금을 뜯어내던 도진회사, 소를 사고파는 상인들에게 강제로 보험에 들게하며 이익을 챙긴 우척보험회사 등이 있었고,
청부폭력을 받던 조직도 존재했다. 바로 왕실의 사주를 받고 만민공동회를 폭력
으로 저지한 보부상, 석전꾼 등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외에도 권력과 함께 성장한 천하장안은 흥선대원군과 함께하던 시정잡배 출신이었다. 이처럼 구한 말에도 주먹들은 권력에 기대어 독버섯처럼 사회에 기생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야쿠자가 한반도로 건너오면서 한국의 조직범죄도 더욱 거대, 기업화되어 간다. 익히 영화나 드라마로 보고 들어봤을 서울의 복잡한 세력분표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고, 우미관 패거리로 대표되는 김두한이 등장한다. 당시는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일까? 야쿠자 하야시와의 대결은 억눌린 민족감정의 통쾌한 대리만족를 가져왔다. 이런 역사는 김두한을 협객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생존을 위해 야쿠자와 타협하고 징용되지 않기위해 의용정신대를 조직해 젊은이들을 전쟁터를 내몰았다. 결국 권력과 주먹의 공생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다큐는 이런 점을 냉정하고 분명하게 그려낸다.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 2세대 정치깡패의 탄생을 알리게 된다. 자유당의 신임을 받던 이정재, 그리고 임화수와 유지광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정치깡패라는 변화된 주먹의 지도는 역사상 드물게도 통합된 시기를 맞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정치에 개입하게 된 깡패들은 부정선거, 고대생 테러사건 등으로 스스로 4.19를 불러오면서 자유당과 함께 세력을 잃고 5.16을 맞으면서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동대문 사단, 화랑동지회로 알려진 이 시기의 정치깡패들은 정치사에 깊숙한 발자취를 남기며 권력과의 유착이라는 주먹의 가장 적나라한 공생관계를 표면에 드러내게 된다. 


사보이호텔 사건을 계기로 회칼시대를 연 3세대 조폭, 호남세력의 상경으로 서울의 밤은 더없이 잔인한 면모를 가지게 된다. 국민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은 권력의 교체기마다 숙청의 대상이었지만, 반면 정치세력의 보이지 않는 후원세력으로 음지에서 꾸준히 활동한다. 90년대 이르러 조직범죄는 더욱 세분화되고 합법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1부에서 복잡하게 얽힌 1세대 주먹들에 지나치게 할양한 덕분에 2부에서는 2,3세대 주먹을 모두 다뤄야 했다. 그래서인지 파란만장한 2세대 정치깡패에 조명이 집중되면서 비교적 3세대 조폭은 제대로 다뤄지진 못했다.

본 다큐는 당시 관련자들의 생생한 육성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하는 현실감을 보이면서 다소 허술할 수 있는 조직범죄에 관한 냉정한 시각을 가진다. 자칫 흥미위주로 흐를 수 있는 분위기를 객관적인 잣대로 분명히 구분지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다만 1,2세대에 비해 3세대 주먹에 대한 부분이 비교적 적은 점과 재연 부분에서 연기자들의 어색한 연기가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은 아쉬점이라 하겠다.

후기를 마무리지으면서 공권력과 결탁하고 자본과 유착하며 성장해가고 있는 현재의 조직범죄를 생각해본다. 과연 조직화된 폭력집단의 구성을 원천적으로 막을 순 없을까? 하지만 그 해답은 이미 다큐를 통해 보여줬다고 본다. 그들을 원하고 필요로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역사나 체험을 통해서 분명히 체득한 사실이다. 다만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매체를 통해 조폭문화를 동경하는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실상을 분명하게 알려서 그들이 음지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한국의 깡패와 건달 - 낭만파에서 정치강패로 전락 -

이성순(일명 시라소니)-공중머리 박치기, 김두환 (일명 잇뽕(한방))-어깨집고 양발차기, 이화룡 (일명 검은신사) 50년대 명동출몰의 황제, 이정재 (일명 마렌코프) 한국의 두산마를 꿈꾼 정치강패, 유지광 삼호회 등 조직의 귀재, 조양은 양은파 두목 3세대 주먹의 선두주자, 김태촌 서방파 두목-칼쓰기. 지금 소개한 사람들은 한국의 100년사 주먹의 대명사다. 이 주먹은 대를 물며 시대의 변화에 맞춰졌다.

깡패는 영화의 단골 출연작. 영화 속 강패는 그 단순함으로 우리에게 웃음을 전해주는 감초 역할도 하지만, 의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멋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검찰 스폰서> 논란과 더불어 폭력과 권력의 공존관계를 파헤쳐 본다. <시사우리신문>은 김두환의 비서 역할을 하기도 한 정정웅씨와 그의 지인들(김동회, 이상욱), 당시 종로 상인들에게서 당대와 현재의 주먹 이야기를 들어본다.

주먹으로 먹고 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더 큰 조직을 찾게 되고 권력과 주먹이 공존하는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검찰 스폰서>관계도 이러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이유에서이다. 정정웅씨는 김두환 의원 비서를 마치고 유정재, 유지광 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이후 정씨는 5공 시절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다음은 이들의 말을 토대로 구성한 내용이다.

본격적 주먹시대는 일제 강점기부터다. 1930년대 일본주먹과 조선주먹이 양분된다.

일제 식민지 정책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도시로 모이게 되고 시장이나 역 근처에서 불황자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람들 중에는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시장을 중심으로 내노라하는 조직에서 일하며 여러 패거리가 난립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는 대학을 나와도 이러타할 일자리가 없어 학생패와 망나니패가 공존했다. 조선의 주먹은 많았지만 조직 수준까지 되지 못했다. 주먹세계의 말의 빌어 지역구 수준이었던 것이다.

전국구가 형성된 것은 언제였을까?

종로의 우미관 극장 주인은 '와카사키'란 일본인이었고, 기도 겸 배후세력으로 복싱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기환 서대문 뫼관패 두목을 영입한다. 이후 와카사키는 김기환의 세력이 커지자, 일본인 서커스단에서 칼로 묘기를 부리던 미또리오 무사시를 영입했다.

미또리오는 성격이 포악해 여성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러 골칫거리로 전락했지만, 당시 우미관패의 꼬봉(?)이던 김두환이 미또오리에게 결투 신청을 해 이기고 말자, 그는 우미관을 떠났고 한 순간에 18세이던 김두환이 훌쩍 커 버린 것이다.

이 시기에 김기환도 경찰폭력 등으로 감옥신세를 져야 했고, 신마적 엄동욱이 홀연 만주로 떠나자, 비로소 김두환은 우미관을 중심으로 전국구에 버금가는 조직을 이룬다.

이후 김두환에게 도전장을 내민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모두졌고 이후 우미관패에 합류하면서 비로소 조선 주먹의 전국구가 형성됐다.

정씨는 "김두환의 싸움 실력을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으며 특히, 여러명과 싸울 때 남의 어깨를 짚고 발차기는 3명의 건장한 남자들을 단숨에 제압하기에 충분했다"고 회고했다.

하야시는 누구?


청계천 사이에 두고 혼마치깡이 있었던 본정3정목(현 충무로 3가). 이곳은 하야시(조선인 선우영빈)란 일본 주먹계의 우두머리가 있었다.

하야시는 일찍이 창시개명을 하고 어려서부터 일본에 넘어가 모든 것을 두산만에게 바쳤다. 두산만(도호야마 미쓰루)은 무사집안에서 태어나 야쿠자들을 양성한 대륙침략의 야심을 가진 자다.

그는 정치 그물로 손문과 김옥균에게 정치자금을 주기도 했다. 하야시는 그 아래에서 일을 봤고 조선의 침략의 야쿠자로 하야시를 보냈다.

하야시는 이런 일본 거물 두산만의 힘을 입고 조선의 종로, 명동, 충무로를 접수했다. 유흥가를 중심으로 돈을 거둬 조직적으로 성장시켰다.

김두환과 하야시의 수표교 결투

하야시는 한날 김두환에게 우미관패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며 3일 뒤 장충당에서 40여명씩 싸우자는 제의를 해 왔다. 김두환이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하야시패는 하루 전날 기습을 하는데 이를 알게 된 김두환 패는 수표교에서 싸움을 벌였다. 무기면으로는 일본이 우월했다. 그러나 비장한 만은 김두환 패가 절박했다. 이 도중 인근 소방서에 포착돼 경찰이 나서 진화 됐다.

하야시는 이후 김두환을 불러 본정의 자전거 보관소의 이권을 가지게 됐다. 하야시를 김두환은 형님으로 모셨지만, 이는 경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며 실제 단속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6.25이후 주먹, 4발의 총성

이정재는 제3세력인 반 자유당 40인 중 1명 암살사건에 김동진을 끌어들이지만 이를 김동진이 고발한 것. 이에 단성사 영화관에 이석재가 김동진이 놀러 온 것을 알고 권총으로 4발을 발사해 살해했다.

이정재 사건은 허지부지 돼 버리고 검찰이 나서자 검찰마저 법복을 벗게 만들었다. 이정재의 위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씨는 당대를 "공권력이 공존하는 시대" 라며 "정치적인 앞잡이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고 말했다 사사오입 개헌, 1957년 반 자유당 장충당 집회에서 조병욱씨의 연설에 폭력사태가 난무했다. 이 사건으로 동대문 사단 이정재의 행동대장 유지광이 체포됐다.

장충당 사건은 언론에서 '깡패'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 시대 김두환이 정계로 떠난 종로는 심종현, 명동 이화룡.정팔, 소공동 홍영철, 광화문 장영빈, 서대문 표창수가 분할 점령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소공동의 홍영철파는 미군의 원조 물자지급에 경쟁 입찰을 협박으로 막고 어마어마한 돈을 챙겼다. 홍영철은 대한실업협회를 만들어 담합입찰로 다시 팔아 폭리를 취했다. 이른바 폭력주식회사로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이들은 1년에 20억 가까운 돈을 30%는 주먹패가, 20%는 군기관, 수사기관에서 가져갔으면 50%는 정치자금에 사용됐다는 것.

박정희, 혁명재판소

당시 시라소니를 영입한 명동파와 동대문파가 대립하고 있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동대문파는 이정재를 중심으로 화랑동지회를 말들어 서대문, 종로, 광화문 등을 포섭했다. 치열한 면동파와의 전쟁이 끝난 것은 경찰과 친분이 있는 이정재의 모략으로 명동파 전원이 무장해제됨에 따라서다.

이후 이정재는 화랑동지회를 이용해 경기도 이천에서 국회의원을 출마의 꿈을 자신이 정치강패로서 권력 2인자 이기붕과 손잡으며 그 해결사로 나서왔다. 자유당 이기붕은 서대문에서 승산이 없었다. 이에 이정재의 이천 출마를 강제로 막으면서 이정재와 이기붕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화랑동지회는 이후 임화수를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정치야욕을 꿈꾸게 됐다. 임화수는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의 도움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양 아들까지 되면서 그 위세는 이정재의 위치와도 뒤 처지지 않았다.

이후 군사 정부의 출헌으로 깡패세력들은 줄줄이 법정에 서게 되고 이정재와 임화수가 사형을 당하게 된다. 이씨는 이에 대해 "당시 군부대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리에 모두 만세를 불렀지만, 오히려 군 부대의 정권창출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라고 말했다.

김두환 정치의 길

1949년. 징용이 시작되고 주먹들도 일부 끌려갔지만 곳곳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등 일본으로서도 고민이었다. 전쟁 때문에 우미관 조직을 징용하는 대신 '반도의용정신대' 결성을 종용했다. 김두환은 고심 끝에 500여명의 주먹들이 모두 가입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6·25가 터지면서 우리 나라 주먹의 역사는 변화의 몸살을 앓는다.

일단 일본인이 빠져나간 명동은 이화룡, '시라소니' 이성순, 장천용 등 서북청년단이 주도권을 차지했다. 또한 김두한이 정계진출로 자리를 비운 종로는 '아이마스' 심종현이 자리잡았고, 동대문은 이정재, 광화문은 장영빈, 서대문은 최창수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이들 중 이정재는 자유당 정권과 결탁하면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정권의 도움을 받아 명동세력을 제거한 후에는 독보적인 1인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정재는 후에 자유당 정권의 버림을 받으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김두환은 잠깐 좌익에 섰다, 아버지의 죽음이 좌익에 의한 것임을 알고 우익으로 돌아서 각종 청년단을 이끌며 정치세력을 넓혀갔다. 김두환의 세력조차도 테러에 가담하면서 ‘백색터러’라는 우익의 청년조직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후 그는 정치에 인문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화려하다.

그는 이미 낭만파 주먹시대를 거쳤고 정치강패에 필요한 소양을 알게된다. 6·25전쟁을 거치고 자유당 정권이 뿌리를 내리면서 정통성이 결여된 정치권이 주먹세계의 물리적 힘을 이용하기 위해 추파를 던졌다. 건달세계도 질적 변화를 겪으면서 이른바 주먹과 권력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는 ‘정치깡패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1954년 김두한의 정계입문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독재와 비리에 맞서 정치인 협객이 되겠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기 주먹의 퇴장. 신상사파 vs 호남파

5·16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주먹들은 '깡패소탕령'으로 인해 그 세력이 현저히 위축됐다. 그러나 1963년 민정이양 뒤 단속이 다소 느슨해지자 명동파 세력을 중심으로 차츰 회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시 기지개를 펴던 주먹계를 통일하고 권좌에 오른 이가 바로 이화룡파의 행동대장 출신인 '신상사' 신상현. 이 시기에는 또 이전까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지방 세력, 즉 호남지역 출신 주먹들이 세력을 확장해나가기도 했다. '번개' 박종석과 김태촌, 오종철과 그 직계 후배인 조양은 등이 이 부류에 속했다. 그리고 이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범호남파는 1975년 '사보이호텔 사건'을 계기로 호남의 전성시대를 열어간다.

이 사건은 유흥업소 주류공급과 업주들에게 받는 월정금을 둘러싸고 명동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범호남파가 사보이호텔의 신상사파를 습격한 사건으로 정통 주먹세계의 종말을 고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즉 이때까지 주먹세계의 불문율이었던 '정정당당한 주먹과 주먹의 대결구도'가 깨지고 사시미칼과 일본도라는 흉기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

3기 주먹의 전성시대

신상사파를 제치고 명동을 차지한 범호남파는 얼마후 분열과정을 거쳐 조양은의 '양은이파'와 사보이호텔 사건으로 새롭게 부각된 김태촌의 서방파, 이동재의 'OB파'가 삼각구도를 이루며 3대 패밀리를 형성했다. 이들은 산업의 고속발전과 더불어 강남을 중심으로 번창하기 시작한 유흥업소에 거점을 두고 건설현장 이권개입, 주류공급권 획득, 업소측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정기적인 상납금 등으로 자금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조직을 확장함으로써 '조폭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즈음에 일어난 최대의 조폭사건은 87년 통일민주당 창당과정에서 조직적 방해 공작을 펼친 이른바 '용팔이 사건'으로 당시 권력의 핵심이던 장세동 안기부장이 개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것은 90년 노태우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조직폭력배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령을 내리면서 부터이다. 보스급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이들도 그 세력이 점차 약화, 지금은 '지역중심'에서 '업소중심'으로 세력 기반을 변화시켜 나갔다. 현재는 전국적 기반을 갖춘 대규모 조직은 거의 사라진 대신 군소세력들이 군웅할거에 들어간 상태다.

전국구 주먹과 ‘3대 패밀리’시대

이정재 이후 약 10년간 패권을 차지한것은 ‘신상사파’ 신상현이었다. 오종철과 박종석( 일명 번개)이 양분하던 ‘범호남파’는 무교동 유흥가를 발판으로 세력을 키운 뒤 ‘신상사파’와 대결구도를 이룬다.

범호남파는 1975년 1월 2일 주류 공급권과 관내 유흥업소 상납금을 둘러 싸고 갈등을 벌이던 신상사파를 명동의 사보이호텔 신년회 현장으로 급습했다. 이 사건을 통해 ‘오종철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조양은이 급부상 했고, 범호남파도 내부 분열을 겪는다. 내부적으로 수세에 몰린 ‘박종석파’의 행동대장 김태촌이 1976년 3월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범호남파의 실질적인 보스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불구로 만들었다. 이후 조양은과 김태촌은 3년간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였다. 이 시기에 오기준, 김태촌이 중심이 된 ‘서방파’와 이동재를 두목으로 한 광주 ‘OB파’가 급속히 세력 을 키워 당시 패권세력이었던 ‘양은이파’와 함께 ‘3대 패밀리 ’를 형성했다. 전국적으로 통하는 주먹이라는 의미의 ‘전국구 주먹시대’는 ‘3대 패밀리’를 비롯해 부산의 칠성파(두목 이강환), 대전의 옥태파(두목 김옥태, 2001년 사망), 대구 동성로파(두목 오대원), 수원파(두목 최창조), 이리 배차장파(두목 김항락) 등이 이끌었다.

이때부터 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잔인해지기 시작 했다. 이들의 활동무대도 상권 중심에서 대형 유흥업소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채권·채무관계 ‘해결사’, 주류도매업, 공 사 입찰, 건축자재 공급권 등 다방면에 진출해 전성기를 누렸다.

 

                                        (옮긴 글) 

 

 

연합신문 2013.1.7일 기사

 

전국 폭력조직 217개…조직원 5천300여명 활동

(서울=연합뉴스) 박용주 기자 =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가 지난 5일 사망한 것을 계기로 조직폭력계의  

                  구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거물급 두목들이 주도하던 전통적인 조직폭력의 시대가 저무는 대신 군소 조직이

                  경합하는 춘추전국 시대접어들었다.

 

전국적인 세력을 일구며 폭력·갈취·사채·성매매·마약매매 등 각종 영역에서 활동하던 전통 조폭과 달리

 

 차세대 조폭은 적정한 규모를 유지하며 기업형으로 진화하고 있다.

7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8월말 기준 전국 217개 폭력조직에 5천384명의 조직원이 활동 중이다.

폭력조직 수를 지역별로 보면 경기가 29개(조직원 912명)로 가장 많고 부산 23개(381명), 서울 22개(484명) 순이다.

김씨가 이끌던 '범서방파',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 등 1970~1980년대를 주름잡던 기존 3대 조폭은 이미 사분오열된 상태다.

김씨의 사망으로 범서방파는 과거와 같은 세를 형성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양은이파도 조직이 분해된데다 조양은씨가 금융권 대출사에 연루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는 등 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OB파도 눈에 띄는 활동이 없으며 두목 이동재씨는 해외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형조직의 빈자리를 중소규모 기업형 조폭들이 채우고 있다.

기업협 조폭은 유흥주점이나 불법게임장, 성매매업소 등 전통 영역이 아닌 건설업, 사채업, 유통업, 엔터테인먼트업 등 합법을 가장한 형태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식시장, 인수·합병 등에도 관여한 데 이어 보험사기, 인터넷 도박사이트 등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파고들고 있다.

경찰은 조폭들이 사채시장에서 사업가 행세를 하며 주식 등을 담보로 잡고 고리로 자금을 빌려준 뒤 이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터무니없이 고금리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금품을 갈취하는 사례가 빈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형 조폭은 자금난을 겪는 기업에 고리로 사채를 빌려주고 기한 내에 갚지 못하면 사업권을 빼앗는 수법도 구사하고 있다.

부실기업을 인수해 경영진으로 들어가서는 자금을 횡령하고 자산을 빼돌리는 수법으로 기업을 사실상 망가뜨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축적한 자금을 활용해 주식시장에서 주가 조작에 관여해 수익을 올리는 수법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경찰은 조폭들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양상을 주시하고 있다.

이들은 연예인을 상대로 금품을 갈취하거나 사진 촬영, 사인회, 각종 행사 출연을 강요하고 연예기획사직접 운영하면서 불공정 계약을 강압하는 등 불법행위를 일삼는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2월부터 두 달간 조폭 특별단속을 벌여 881명을 검거하고 그 중 175명을 구속했다.

2011년 10월 인천 장례식장 조직폭력배 난동 사건을 계기로 집중적인 단속을 벌여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전국적인 조직이 사라지고 중소규모 조직이 실리를 추구하는 형태로 점차 변화하는 추세"라면서 "2011년 말 조폭 단속 때도 보듯 경찰이 관리 가능한 범위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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