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으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오는 건데….”
동생 유의형씨가 안타까워하자 형 유시형씨도 “배를 좀더 집어넣어야 하니 하나, 둘, 셋을 세어달라”며 사진기자에게 농을 건넨다. 살짝 나온 아랫배만큼이나 여유로운 중년이 된 가수 유심초. 이들은 얼마 전부터 다시 무대 위에 서고 있다.
유심초는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활동했던 대표적인 포크가수. 친형제인 이들은 준수한 외모와 감미로운 하모니로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포크음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형 시형씨가 미국 이민을 떠나면서 해체되었던 유심초가 다시 뭉쳐 활동을 재개한 것은 지난 2월.
“다시 유심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미국으로 떠나면서 음악세계에서도 완전히 떠난다고 생각했거든요. 주변에서 ‘언제 복귀하냐’고 궁금해하는 분들도 많았지만 그 쪽에서 하던 사업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음악을 할 형편이 아니었어요. 이번에도 동생이 아니었으면 결정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시형씨의 말처럼 유심초의 재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동생 의형씨다. 두 사람은 해체 후 모두 가수가 아닌 생활인으로 살아왔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시형씨나 국내에 남은 의형씨 모두 사업에 몰두하느라 노래와는 담을 쌓고 지낸 것.
유심초가 다시 무대로 돌아오게 된 것은 다름아닌 팬들의 뜨거운 요청 때문이다. 경기도 미사리 일대 라이브 카페가 활성화되면서 유심초의 히트곡을 신청하는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 결국 의형씨는 미국에 있는 형 시형씨를 대신할 기타리스트를 영입해 2001년부터 유심초라는 이름으로 먼저 활동을 시작했다.
“라디오나 라이브 카페에서 우리가 불렀던 ‘사랑하는 그대에게’라는 노래가 계속 신청곡으로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어요. 우리가 활동을 접었는데도 팬들이 계속 관심을 갖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이제 경제적으로 안정도 됐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노래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미국에 있는 형도 불러들인 거고요.”
올해 2월 의형씨의 끈질긴 권유로 형 시형씨는 미국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귀국했다. 순전히 유심초로 다시 활동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유심초는 미사리 라이브 카페 바고와 2년 계약을 맺고 재결성 첫 무대에 섰다. 두 사람 중에서도 어렵게 유심초에 합류한 형 시형씨에게 첫 무대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있을 때 사무실에서 우리가 불렀던 노래를 우연히 들을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면 정말 내가 부른 노래가 맞나 싶기도 하고 한창 활동하던 때가 아득한 꿈처럼 느껴지곤 했죠. 같이 활동했던 가수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기도 했고요. 2월20일에 처음으로 무대에 섰는데 너무 떨려서 가사를 바꿔 부르는 실수도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어요.”
( 한참 지난 기사를 펌한 것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