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교훈들

춘성 스님의 일화

리멘시타 2012. 11. 27. 17:07

 







만해 한용운 스님의 제자


춘성 스님의 일화(春城 1891~1977)

         

종교의 참 뜻을 깨우친 선승으로  속명은 이창림(李昌林),

1891년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서 태어나 190113세 때

 

백담사에서 출가하여 10여년간 만해 한용운을  모시며 수학하였다.

 

1919년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가 되었고, 1929년 만공의 법을  이어받았다.

 

 19506.25 전쟁 때에는  북한산의 망월사를 떠나지 않았다.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쟁이 스님으로도 통했으나 평생을

 

옷 한벌 바리때 하나만으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였다.

 

 50여년을 망월사에서 보냈는데 80 노구에도 잠을 주무시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는 모습과 망월사 선원 큰방에서 대중들과 같이

 

수행에 전념하는 모습은 이제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1977년 불국사에서  나이 87, 법랍 74세로 입적하였다.

 

 유언에 따라 사리와 재는 서해에 뿌려졌다.

 

 

춘성 스님의 일화

 

1

 

하루는 제자 하나가 스님에게 질문하였다.

 

"스님!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 발 내디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 이 새끼야. 내가 떨어져봤어야 알지."

 

 

2

 

통행 금지가 있을 때....

 

하루는 통행 금지 시간을 지나서

 

 스님이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순찰하던

 

 방범대원과 마주치자 방범대원이 물었다.

 

"거기 누구요?"

 

"?  중대장이야."

 

"아니 스님 아닙니까?"

 

"그렇지, 내가 바로 중의 대장이지."

 

 

3

 

 스님은 생전 서랍이든 문이든 잠그지 않았다.

 

걱정이 된 제자 하나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그래도 잠가야죠."

 

"야 이눔아! 내가 아비 어미 다 버리고 중이 되었는데

 

무엇이 그리 중요한 게 있다고 잠그겠냐?"

 

 

4

 

하루는 스님이 서울역에서 전철을 탔다.

 

잠시 후  "예수 천국, 불신자 지옥" 피켓을 든 기독교인들이

 

 스님이 있는 칸에 우르르 몰려 오다가

 

스님을 발견하곤 스님 앞에 다가와 점잖게 말했다.


"죽은 부처를 믿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시오.

 

그래야 천국에 갑니다."


순간 전철 안 사람들의 눈이 휘둥굴해졌고 스님의 기골이

 

 장대한지라 분명 싸움이 나겠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님이 그 말을 건넨 사람을 올려다 보면서 말했다.

 

 

"부활이 뭔데?"

 

"부활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오.

  

부처는 죽었다가 살아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오.

 

그러니 죽은 부처보다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이

 

휠씬 위대하지 않소?  예수님을 믿으시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부활이라고?"

 

"그렇소."

 

 스님은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너는  내 거시기를 믿어라.

(실제로는 좆이라 했다 )


내가 여태 살면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거시기밖에 보질 못했다.

 

내 거시기는 매일 아침 예수같이 부활하니

 

 너는 이제부터 내 거시기를 믿거라."

 

피켓을 든 기독교인들은  혼비백산 사라졌고

 

이를 지켜보던 전철 승객들은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5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스님은 육영수 여사 생일에 초대되었다.

 

그 자리에서 불자인 박 대통령과 육 여사가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마이크  앞에서 아무런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침묵이 길어져 참가자들의 기다림이 한계점에 이르게 되자

 

 스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애미 보지에서 응아하고 나온 날입니다.”

 

듣고 있던 대중들은 영부인의 생일에 한 이 법문에 놀라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스님은 아무 표정없이 할 말을 했을 뿐이란 표정이었고

 

육여사 또한 스님의 법력을 아는 지라 미소만 지으셨다.

  

 

  6

 

    또 한번은 육 여사가 춘성 스님이

 

     큰 스님임을 깨닫고 뵙기를 청했더니....

  

"나와 연애 한 번 하자." 하여

 

육여사가 " 몸과 마음을 바쳐 불사에 힘쓰겠다."

 

고 대답하고는 이 사실을 박대통령에게 알리니

 

박대통령이

 

"불교계에 큰 스님이 나셨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역시 도()란 평등심에서 나온다.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천한 사람이라 해서 도가 없으라는 법도 없다.

 

이 세상은 공평해서 50이 넘어서 흰머리 안 나는 사람이 없고,

 

 태어날 때 울지 않는 자가 없으며

 

 똑같이 이 세상을 한 번 왔다가는 것이다.

 

이만하면, 콧대 높은 부인네들에게

 

좋은 무상 법문을 해준 것 아닌가....

 

 

 7

 

   스님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스님은 정진 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법당 뒤 빈터에 구덩이를 파고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다.

 

엄동설한, 자칫하면 항아리가 얼어 터질 지경이었는데

 

스님은 참선 수행을 하다가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찬물이 담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내밀고 앉아 큰 소리로 외쳤다.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8

 

수행자로서 춘성 스님은 참으로 무서운 분이셨고

 

서릿발 같은 분이셨다.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 수행을 할 적에

 

젊은 수좌들이 담요를 덮고 자다가 스님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어떻게 수행자가 편하게 따뜻한 잠을 잘 수 있느냐?

 

 이 씨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이리 내놓지 못하겠느냐!”

  

 스님은 기어이 젊은 수좌로부터 담요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토록 수행에 철저했던 스님이

 

서울 근교 어느 비구니 사찰 중창 불사를 위한 법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법문을 남기기도 했다.

 

시집 장가 가는데는 보지와 자지가 제일이듯.

 

중창 불사 하는데는 돈이 제일이니

 

오늘 이 법회에 온 년들아,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

 

 

 

 춘성(春城·1891∼1977) 스님

춘성 스님은 만해 한용운이 3·1 운동으로 수감되자 3년 동안 옥바라지를 했으며,

스승을 생각해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은 냉골 방에서 이불도 덮지 않고 지냈다.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쟁이 스님’으로도 통했으나 평생을 옷 한 벌,

바리때 하나 만으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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