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교훈들

장례식장의 스님과 목사

리멘시타 2014. 8. 30. 00:44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던 시절이야기
 
   한경직 목사·성철스님·김수환 추기경 따라가 보라
 無欲·淸貧·솔선수범·관용의 정답이 거기 담겨
    요즘 들어 밥상머리에 종교 이야기가 올라오는 일이 잦아졌다.

     

     여러 종교의 집안 사정이 걱정스럽다는 투의 이야기다.

    그 가운데는 풍설(風說)에 억측(臆測)의 살을 붙인 것도 적지 않다.
    이해타산이 얽히고설킨 세속사(世俗事)가 만만치 않은 거라면, 그 세속의 질긴 인연을 뎅겅 베 내던지고 돌아선 이들이 

    모인 성직(聖職) 세계는 더 녹록지 않은 법이다.
    헛짚고 함부로 입방아를 찧을 일만도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종교에 폐를 끼쳐왔는데, 그게 언제였느냐는 듯 근년의 몇몇 사건을 들어 

       종교 흉을 보는 게 유행이 되다시피한 세태에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걸 실감한다.


    우리 사회가 종교에 두통거리를 안겨주던 시절, 우리들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 종교계의 큰 어른으로 한경직 목사(1902~2000) 성철 스님(1912~1993) 김수환 추기경(1922~2009) 세 분을 꼽는 데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세 분은 각기 다른 종교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는데도 그분들을 한데 묶는 공통 단어는 금방 떠오른다. 청빈(淸貧)이다.

        한국 대형 교회의 원조인 영락교회를 일으킨 한 목사님이 남긴 유품은 달랑 세 가지였다.

    휠체어·지팡이·겨울 털모자다. 집도 통장도 남기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기우고 기워 누더기가 된 두 벌 가사(袈娑)를 세상에 두고 떠났다.
    김 추기경님이 지구를 다녀간 물질적 흔적은 신부복과 묵주뿐이다.

    얼마 전 추기경님의 또 다른 유품 뒷소식이 신문 모퉁이에 나왔다.
    추기경님이 기증한 각막을 이식받고 시력을 되찾은 어느 시골 양반이 용달차를 몰게 됐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 분은 엄청난 재산가였다.
    각각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주었다.
    목사님이 작고한 이후 개신교는 또 한 차례의 중흥기(中興期)를 맞은 듯 신도 수가 크게 늘었다.
    성철 스님 열반(涅槃) 뒤 스님의 삶이 알려지면서 불교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 자체가 달라졌다.
    추기경님은 생전부터 재산을 물려주기 시작했다.
    그가 천주교를 이끌던 시절 신도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세상을 떠난 다음 세 분의 향기는 신도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국민들 사이로 깊고 멀리 번져갔다. '가난한 부자들'이었다.

    세 분은 예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던 분에 그친 게 아니라
    예수님과 부처님의 삶을 지금 여기서 그대로 살아보고자 했던 분이었다.
    그걸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목사님은 설교 중에 몇 번이고 신도들을 울리고 웃기는 능변(能辯)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전설적인 목회자로      존경받았던 것은 그의 삶이 설교의 빈 구석을 채우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어느 겨울 한 신도가 목사님이 추운 기도실에서 기도하다
    감기에 걸릴 걸 염려해 오리털 잠바를 선물했다.
    얼마 후 그 신도는 영락교회에서 백병원 쪽으로 굽어지는 길목에 바로 그 잠바를 입고 한 시각장애인이 구걸하는           모습을 만났다.


    목사님 아들도 같이 목회자(牧會者)의 길을 걸었지만 후계자라는 단어조차 흘러나온 적이 없었다.
    성철 스님은 늘 신도들의 시주(施主)를 받는 걸 화살을 맞는 것만큼 아프고 두렵게 여기라고 가르쳤다.
    쌀 씻다 쌀이 한 톨이라도 수챗구멍으로 흘러간 흔적이 보이면 불호령을 내려 다시 주워 밥솥에 넣도록 했다.
    불교계의 큰 어른인 종정(宗正)직을 오래 맡았지만 중 벼슬은 닭 벼슬만도 못하다며 항상 종정 자리를 벗어날 틈을        찾곤 했다.

    추기경님이 남긴 인생 덕목(德目)의 하나에 '노점상'이란 항목이 있다.
    '노점상에게 물건 살 때 값을 깎지 말라. 그냥 주면 게으름을 키우지만 부르는 값을 주면 희망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대로 추기경님은 명동의 노점상 앞에 가끔 걸음을 멈추고 묵주를 샀다.

    세 분은 평생 일편단심으로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실천하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씀한 적이 없다.
    목사님은 교파의 경계를 넘어서는 교회 일치 운동에 열심이셨고
    추기경님은 성철 스님의 부음을 접하고 누구보다 먼저 조전(弔電)을 보냈다.
    성철 스님은 여러 종교의 경전에도 두루 관심을 보인 분이었다.

    한국 종교계는 복(福)이 많다.
    오늘의 문제를 풀기 위해 멀리 밖에 나가 배울 필요가 없다.
    고개를 들면 스승의 얼굴이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그분들의 생애가 펼쳐져 있다.
    생(生)의 심지가 닳고 나서 더 환하게 세상을 비추던 세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만 해도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

    [ - 출 처 ; 조선일보 강천석 주필님의 글에서 - ]


    장례식의 스님과 목사님

     

    십 여년 전,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풍경 하나가 장례식에 갈 때마다 떠올라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어렸을 적부터 같이 자란 소꿉 친구의 집안 장례식에 얽힌 이야기다.
    친구의 아버님이 직장암 말기로 병원에서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장례 이야기가 오갔다.
    문제는 장남인 친구 오빠는 장로교회 장로이고
    둘째 오빠는 신도회장까지 하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전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식의 장례를 할 것인가를 놓고 여자는 빠진 상태에서 남자 형제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형제는 정작 장례식을 어떤 식으로 치룰 것인가에 결론을 보지 못한 사이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큰 오빠는 장례에 관한한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 분들과 같이 하고 싶어했다.
    이것은 장남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아버님 살아 계실 적 아버님이 예수님 영접하길 바라던 큰 오빠는 나에게 둘째 오빠를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하며 장남으로서 큰 소리 칠 수 없는 입장이라는 점도 밝혔다.

    큰 오빠의 말에 의하면 둘째가 그간의 모든 병원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둘째가 형의 말을 안 듣는데다가 자신보다도     집안에서의 목소리가 더 크다는 것이었다.
    장남으로 병원비용은 마땅히 형이 해야 할 일 이었지만 형의 대리점 사업도 문을 닫은 상태라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은행 지점장으로 여유가 있는 둘째 오빠가 그간의 모든 병원비용을 떠맡았었다. 큰 오빠 작은 오빠가 서로의 의견을 내세우자 여자들 포함 모두 여섯 명인 자식들은 두 편으로 서로 갈라 섰다.
    일주일 후 아버님이 돌아가실 즈음엔 서로 말을 하지 않을 만큼 사이가 나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장례식장에서 오빠들을 다시 보았다.
    아침 일찍 도착하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시작했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염불이 무르익을 즈음 큰 오빠가 장로로 계신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 집사, 

    권사님 몇 분이 들어왔다.
    조용히 한쪽 구석에 앉은 목사님은 눈을 감고 기도를 하셨다.

    염불이 끝나자 목사님이 스님에게 다가가고 스님은 목사님에게 머리 숙이며 합장을 했다. 목사님은 스님의 두 손을

          맞잡으며 따스한 인사를 건네고 스님도 두 손을 꽉 잡고 반가워 했다. 오래 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두 사람은 가까워 보였다.
    두 분 사이엔 일종의 동지애 같은 것이 있어 보였다.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자 이제 목사님 차례가 왔습니다.” 하며 자리를 뜨려 하자 목사님은 “스님에게 우리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하며 합장을 해보였다.
    그러자 스님은 문까지 배웅하는 목사님에게 “목사님께서 우리 아버님 꼭 천당가게 해 주셔야 합니다.” 

      하며 발 길을 멈췄다.

    이에 어두운 장례식장에 잠시 웃는 얼굴이 몇몇 보였다.
    두 오빠의 얼굴에도 잠시 씁쓸하기도 한 미소와 함께 멋적은 표정이 섞였다.
    그리곤 교회와 절에서 온 조문객을 맞는데 벽이 없어 보였다.
    장례식을 두고 신앙 때문에 일어난 형제간의 불협화음이 이 두 성직자들로 인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조화시켜 하면 될 것을 굳이 “내 식”, “네 식” 고집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열린 마음을 가진 성직자의 면모를 새삼 보게 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우리 시각이 항상 자기 것에만 갇혀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이런 이야기에 김경섭 박사님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몇 년 전 취재차 만났었지만 무척 신선했다.
    박사님은 전남 고흥의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태어났다.
    누나 둘 중, 한 사람은 불교, 한 사람은 카톨릭, 남동생 한 분은 기독교, 한 분은 불교, 막내 여동생은 카톨릭이다.

    이렇게 모두 두 사람씩 다른 신앙을 갖고 있지만 박사님 집안은 형제간 우애가 좋기로 장안에서 소문난 집이다.
    그런데 8 년 전 형제들은 어머님의 장례를 치르며 약간의 진통을 겪어야 했다.
    문제는 “어떤 종교 의식으로 장례를 치를 것인가” 였고 세 가지 종교적인 배경으로 인한 다른 의견이 나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 때 박사님은 장남으로서의 권한 행사가 아닌 어머님의 뜻을 받는 장남으로서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
    박사님은 평소의 생각대로 밀고 나갔고 그것은 바로 “다르니까 거기엔 분명 좋은 점이 있다. 그러니 각기 다른 점을      

     조화시키자” 였다.

    그리하여 매일 시간을 정하여 천주교 식, 기독교 식, 불교 식의 세 종교로 추모 행사를 번갈아 가며 했다.
    그런데 스님이 목탁이라도 치면 기독교인 형제들의 불만이 나왔다.
    그럴 때 박사님은 “극락 간다는 데 거기 좋은 곳 아닌가” 하고 대응 했다.
    불자인 가족이 교회에서 온 조문객의 찬송에 대해 불만이 들어오면 “천당 가게 해 준다는데 뭐가 나쁘냐” 고 응수했다.
    남동생은 입관 시 관에 반드시 '금강경' 을 넣어야 한다고 하고 기독교인 가족들은 '십자가'를 강력 주장했다.
    결국 입관에는 십자가와 금강경이 같이 들어 가도록 했다.


    서울 삼성병원에서 치룬 영결식은 결국 여러 종교의 의식을 거치는 추모행사로 바뀌었다. 자식은 어머니에 대해,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대해, 사위는 장모님에 대해, 손주들은 할머님에 대해, 각자가 생존 시 어머님, 할머님과 관련되어 떠올리는 

    기억을 모아 모두 6 명이 어머님 영정 앞에 추모문을 올렸다. 테너인 장 손주는 주기도문을 노래하고 모든 증손주들은

     꽃 바구니를 헌정 함으로써 할머님을 기쁘게 보내 드렸다.


    흔히 울음바다로 시작해 장지까지 눈물만 보이는 장례식과 대조되는 광경이었다.
    “대 종교 셋이 장례를 해주니 어머님이 무척 좋아하실 거에요.
    반드시 슬퍼하고 많이 우는 것만이 추모는 아니지요.
    가족과 친인척을 중심으로 반드시 어머님과 알고 지내던 분에게만 부고를 했고 부조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이젠 우리의 장례 문화가 조금 바뀔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장례는 마쳤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조정이 필요해 진 것은 바로 어머님의 첫 제사 때였다.
    어머님 영정 앞에 절하는 의식을 놓고 기독교인 가족들의 이견이 나왔다.
    다시 한번 지혜가 필요한 시간이 온 것이다. 박사님은 제사를 1년에 한번 온 가족이 모이는 추모모임으로 바꾸고

       형제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 ‘어머님은 우상이 아니다.
    절을 할 사람은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좋다’ 하고 못을 박았지요
    . 대신 ‘어머님, 감사합니다’ ‘어머님, 그립습니다’
    ‘어머님, 존경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제사에 임하도록 했지요.”

    장례식도 이렇게 아름다운 추모 풍경이 될 수 있다.
    한 집안의 종교사와 함께 다름의 차이를 조화로 이끌어 내는 분에게 난 큰 공부를 했었다.

    [-죽음학회 정보 게시판 ‘김나미 작가'의 글-]


    슈베르트 세레나데 -나나무스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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