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일

1900년대 전후의 역사풍경

리멘시타 2013. 6. 5. 10:21

                    불과, 100여년전의 모습이... 

           앞으로 100년후엔 어떻게 변할까...?    

 

        



    1920년대 남대문통의 모습



    1935년 청량리역 앞의 모습





    1910년 용산역의 모습





덕수궁 안에서 바라본 경성(현 서울)
그래도 제법 높은 건물이 많이 보인다
.



남대문로와 종로가 만나는 1905년 무렵의 보신각 주변.전차가 지나가고 있다.





현재의 을지로 입구에서 광교 쪽을 조망한 경관
콜로니엄 양식의 건물들이 제법 고색창연하다
길 오른쪽 붉은색 벽돌 건물은 지금의 우리은행이다





[THE QUEEN OF KOREA]
1894. 11. Frank G. Carpenter에
‘서울의 중심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남대문로의 모습
거리 양쪽에 한옥 상가 앞쪽으로 초가로 조성된 가가(假家)가 늘어서 있어
상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3월에 찍은 광화문 거리.





헤르만 잔더가 1907년 9월 무악재를 넘다가 찍은 사진.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북한산이다.





    경성부청(지금의 서울시청) 건물.





    1925년의 서울역.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의 하나.당시 경성과 부산을 오가던 특급
[아카즈키(あかづき=붉은 달)] 일등전망차의 호화스러운 모습으로
일본 고관 및 친일 상류인사들이 주로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부산역사





    부산 세관의 모습





    1930년대 부산 초량 입구





     1930년대 부산 청사의 모습





    1930년대 부산 연락선 출항 모습





     1940년 부산 대청동





    일제강점기 대구역 앞 광장





     일제강점기 대구 서문시장





     일제강점기 대구시청의 모습





     일제강점기 대구 본정통의 모습





     일제강점기 대구 서문시장의 모습





     1940년대 대구역에서 바라본 중앙통의 모습





    일제강점기 대구 원대통 거리





    인천의 일본인 거리 모습





    일제강점기 대전역의 모습





     일제강점기 대전역 주변의 모습





       1936년 9월 충청남도 대전군 회덕면 송촌리 쌍정당의 모습





    일제강점기 수원역 모습





   수원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경성이라고 불리던 서울의 모습



   남산공원 야외 음악당



   경성 시가지 일부



京城 東洋拓殖株式會社.
日帝가 1908년 12월 자본금 1천만원으로 설립한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을지로 2가에 있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아서 한국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무렵에는 7만8천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여
한국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東拓의 소작료는 일반 민간보다 상당히 고율이었을 뿐 아니라,
수탈 방법도 악랄하였으므로, 한국인들의 東拓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
현 을지로쪽 명동 입구



   덕수궁 안에서 바라본 경성시가 일부



   경성 太平通



   조선은행 앞 대광장



   경복궁 集玉薺



이 건물은 현 충무로 입구 신세계백화점으로 1934년에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 연건평 3,000여평의 건물로서 양식주의에서 근대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이다.



   경성 종로 2가 거리



   京城驛에서 남대문 방향



  동대문 밖 조선인 마을



  경복궁 광화문



  경성 동대문



  종로 보신각



경 성 東小門 (惠化門).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北門(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경복궁 광화문


La Paloma/Acker Bi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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