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의 타이타닉호의 침몰사고와 오늘, 우리들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개탄해 본다.
(본 배경음은 종교와는 무관합니다.)
Nearer My God To Thee-Phil Coulter 외 주옥같은 여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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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사건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여객선의 대형사고라는 점에서 조갑제 선생의 글을
옮겨와, 사고를 수습하는 추악한 우리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비교해 보기로한다.
타이타닉호 침몰 때,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살아난 남자중엔 타이타닉호를 보유한 화이트스타라인 회장 브루스 이스메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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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4월14일 밤 세계 최대의 여객선인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중 대서양에서 氷山과 충돌, 15일 이른 새벽에 침몰하였을 때 2223명이 타고 있었다. 31.8%인 706명만이 살아남고 1517명이 사망하였다. 여자승객의 74%, 어린이의 52%가 살아남았는 데 반하여 남자승객의 20%만이 구조되었다. 1등석 승객 중에서 어린이 전원과 144명의 여성 중 139명이 살았고 남성은 70%가 죽었다. 어린이와 여성들을 우선적으로 구명보트에 태웠기 때문이다.
2등석 손님 중에선 여성의 80%가 구조되었고, 남자의 90%가 죽었다. 1,2등석 손님들은 당시 미국과 영국의 최상류층이었다. 미국 최고의 부자라고 불리던 존 제이콥 아스톨씨는 아내를 데리고 와서 보트에 태운 뒤 同乘(동승)하기를 거부하고 배에 남아 있다가 죽었다. 또 다른 巨富(거부) 벤자민 구겐하임은 자신에게 돌아온 보트의 자리를 여성에게 양보하고 죽었다. 그는 그 여성에게 '내 아내에게 내가 정정당당하게 행동했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월래스 하트레이가 지휘하던 8명의 樂團(악단)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들은 기울어가는 갑판에서 계속 연주를 하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승객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배가 거의 수직으로 기울어 침몰을 시작할 때까지 연주를 했다고 하여 타이타닉호를 다루는 영화에마다 등장하는 장면이 되었다.
이 樂團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목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으나 찬송가 '내 주를 가까기 하게 함은'이라는 게 定說(정설)이다. 하트레이는 평소에도 '만약 내가 탄 배가 침몰하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을 연주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살아난 남자중엔 타이타닉호를 보유한 화이트스타라인 회장 브루스 이스메이도 있었다. 이스메이는 선장에게 속도를 더 내도록 압박, 사고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氷山(빙산)과 충돌한 뒤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선장에게 지시, 침몰을 앞당겼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대한 비방의 핵심은 최종책임자가 어떻게 살아났느냐였다. 선장도 죽고 수많은 영국과 미국의 부자들이 구명정 탑승을 포기, 배와 같이 침몰하였다. 미국 최고 부자중 한 사람이었던 구겐하임은 애인을 데리고 탔었는데 애인을 구명정에 태워 보내고 자신은 남아 '신사답게'(바에서 술잔을 비우면서) 최후를 맞았다.
이스메이는 구명정 C를 탔는데, 그는 "배를 탈 때 둘러봤더니 아무도 없었다"고 변명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타이타닉호가 거의 수직으로 침몰할 때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그가 만든 배가 처녀항해에서 비참한 꼴을 당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영국과 미국의 언론은 이스메이를 '타이타닉호의 비겁자'라고 부르면서 조롱하였다. 한 작가는 그를 비방하는 詩를 썼다. "캄캄한 밤중의 바다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는 건 바닷사람의 의무이고, 군중과 함께 도망치는 건 船主(선주)의 고귀한 권리인가?"라는 문장도 있었다.
영국의 上流(상류)사회도 그를 파문하다시피 하여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는 곧 해운회사에서 은퇴, 아일란드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37년에 74세로 죽었다.
월남전 때 미군 사령관이었던 웨스터모어랜드 장군은 미국의 정예 공정사단의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이 부대가 낙하 훈련을 했다. 물론 그도 뛰어내렸다. 그날 강풍에 휘말려 부대원 7명이 죽었다. 다음날도 강풍이 불었으나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낙하 훈련을 중단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다만, 자신이 먼저 뛰어내려 강풍을 확인해볼테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사단장이 홀로 낙하했다. 着地(착지)엔 성공했으나 낙하산이 强風(강풍)에 휩쓸려 끌려가다가 겨우 정지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훈련을 중단시켰다.
영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누가 만들어서 준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王權(왕권)과 싸워 쟁취한 것이다. 그들은 富에 따른 명예와 의무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영국의 신사는 힘 센 사람이 아니라 '신사답게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자본가였다. 체제를 만든 사람들이 그 체제의 혜택을 보면서 또 그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자본가들은 독재자와 선동가로부터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 자유민주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인 자본가와 기업인들은 애국운동단체를 돕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敵(적)들을 돕고 있다. 그들은 독립투사들과 군인들과 혁명가들과 엘리트 관료들이 만들어준 체제의 혜택만 볼 뿐 체제를 싸워서 지켜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비겁한 富者(부자)들이다. 그러니 좌파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이 인구 3억의 인도를 다스릴 때 인도엔 약 15만 명의 영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6만 명은 군인이었다. 영국 군인들은 이 광활한 대륙의 변경에 퍼져서 주둔했으므로 보통 인도인들은 영국 군인들을 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여 이런 少數(소수)로써 多數(다수)를 다스릴 수 있었는가.
인도행정청(India Civil Service: ICS)이 그 비밀이었다. 인도행정청에는 약 1000명의 영국 공무원들이 근무했는데, 이들이 인도 각지에 파견되어 식민지 행정을 맡았다. 이 1000명이 사실상 3억 인구를 다스린 것이다. 이 3억 인구는 언어만 해도 20가지이고 지방語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다가 종교 인종도 각양각색이었다. 이런 인도를, 영국 공무원 한 사람이 30만 명씩 안정적으로 관리했던 셈이다. 이 불가사의한 행정의 비밀에 대한 연구서적이 수년 전 출판되었다.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라는 사람이 쓴 《지배계급》(The Ruling Caste, 출판은 Farrar, Straus, Giroux, 381페이지, 27달러)이 그것이다.
인도행정청에서 근무할 영국인을 뽑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영국정부는 애국심과 자부심에 기반한 公人(공인)윤리를 반복교육으로 깊게 심었다. 학생들은 인도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다. 영국정부는 이들에게 그런 현지 관련 지식보다는 '제국의 魂(혼)'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인도에 대한 지식은 현지에 부임하여 배우도록 했다. 그 대신 大英(대영)제국의 知的(지적)이고 도덕적인 우월성에 대한 교육이 행해졌다. '유럽 도서관 한 개의 선반위에 올라 있는 책이 인도와 아라비아 전체의 문학작품을 모두 모은 것보다 더 우수하다'는 식의 교육이었다.
著者(저자) 길모어씨는 이 책에서, '제국주의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무장한 이 젊은 관료들은 '책임을 떠 안는 것의 쾌감'을 간직하고 어떤 경우에도 조국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이들이 인도에 가서 부임하는 곳은 교통이 불편한 奧地(오지)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무슨 사고가 일어나도 상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할 수가 없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결단력이 요구되었다. 영국관료들은 실용주의와 상식에 기초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부임 초기부터 터득해나갔다.
소요사태를 예방하려면 우선 지배층이 민중을 자극하지 않아야 했다. 영국관료들은 인도사회의 풍습이나 사회적 관행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불태워 순장하는 식의 야만적인 풍습은 금지시켰다. 인도사람들은 세금을 내고, 지역관리들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영국인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영국관리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현지의 언어에 숙달해야 했다. 이 식민통치 관리들의 행동윤리는 피지배층을 대할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이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영국관리들은 절대로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인도 민중의 定評(정평)이 이들의 통치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인도는 독립한 뒤에도 영국행정청의 이름을 India Administrative Service로 바꾸고 그 골격을 이어갔다. 물론 영국인은 인도관리로 교체되었다. 인도는 영국관리들이 남긴 전통, 즉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한 公職(공직)규범을 그대로 계승하여 오늘날 세계최대의 민주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 행정관료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끝)
2등석 손님 중에선 여성의 80%가 구조되었고, 남자의 90%가 죽었다. 1,2등석 손님들은 당시 미국과 영국의 최상류층이었다. 미국 최고의 부자라고 불리던 존 제이콥 아스톨씨는 아내를 데리고 와서 보트에 태운 뒤 同乘(동승)하기를 거부하고 배에 남아 있다가 죽었다. 또 다른 巨富(거부) 벤자민 구겐하임은 자신에게 돌아온 보트의 자리를 여성에게 양보하고 죽었다. 그는 그 여성에게 '내 아내에게 내가 정정당당하게 행동했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월래스 하트레이가 지휘하던 8명의 樂團(악단)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들은 기울어가는 갑판에서 계속 연주를 하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승객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배가 거의 수직으로 기울어 침몰을 시작할 때까지 연주를 했다고 하여 타이타닉호를 다루는 영화에마다 등장하는 장면이 되었다.
이 樂團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목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으나 찬송가 '내 주를 가까기 하게 함은'이라는 게 定說(정설)이다. 하트레이는 평소에도 '만약 내가 탄 배가 침몰하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을 연주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살아난 남자중엔 타이타닉호를 보유한 화이트스타라인 회장 브루스 이스메이도 있었다. 이스메이는 선장에게 속도를 더 내도록 압박, 사고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氷山(빙산)과 충돌한 뒤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선장에게 지시, 침몰을 앞당겼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대한 비방의 핵심은 최종책임자가 어떻게 살아났느냐였다. 선장도 죽고 수많은 영국과 미국의 부자들이 구명정 탑승을 포기, 배와 같이 침몰하였다. 미국 최고 부자중 한 사람이었던 구겐하임은 애인을 데리고 탔었는데 애인을 구명정에 태워 보내고 자신은 남아 '신사답게'(바에서 술잔을 비우면서) 최후를 맞았다.
이스메이는 구명정 C를 탔는데, 그는 "배를 탈 때 둘러봤더니 아무도 없었다"고 변명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타이타닉호가 거의 수직으로 침몰할 때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그가 만든 배가 처녀항해에서 비참한 꼴을 당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영국과 미국의 언론은 이스메이를 '타이타닉호의 비겁자'라고 부르면서 조롱하였다. 한 작가는 그를 비방하는 詩를 썼다. "캄캄한 밤중의 바다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는 건 바닷사람의 의무이고, 군중과 함께 도망치는 건 船主(선주)의 고귀한 권리인가?"라는 문장도 있었다.
영국의 上流(상류)사회도 그를 파문하다시피 하여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는 곧 해운회사에서 은퇴, 아일란드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37년에 74세로 죽었다.
월남전 때 미군 사령관이었던 웨스터모어랜드 장군은 미국의 정예 공정사단의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이 부대가 낙하 훈련을 했다. 물론 그도 뛰어내렸다. 그날 강풍에 휘말려 부대원 7명이 죽었다. 다음날도 강풍이 불었으나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낙하 훈련을 중단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다만, 자신이 먼저 뛰어내려 강풍을 확인해볼테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사단장이 홀로 낙하했다. 着地(착지)엔 성공했으나 낙하산이 强風(강풍)에 휩쓸려 끌려가다가 겨우 정지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훈련을 중단시켰다.
영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누가 만들어서 준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王權(왕권)과 싸워 쟁취한 것이다. 그들은 富에 따른 명예와 의무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영국의 신사는 힘 센 사람이 아니라 '신사답게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자본가였다. 체제를 만든 사람들이 그 체제의 혜택을 보면서 또 그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자본가들은 독재자와 선동가로부터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 자유민주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인 자본가와 기업인들은 애국운동단체를 돕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敵(적)들을 돕고 있다. 그들은 독립투사들과 군인들과 혁명가들과 엘리트 관료들이 만들어준 체제의 혜택만 볼 뿐 체제를 싸워서 지켜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비겁한 富者(부자)들이다. 그러니 좌파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이 인구 3억의 인도를 다스릴 때 인도엔 약 15만 명의 영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6만 명은 군인이었다. 영국 군인들은 이 광활한 대륙의 변경에 퍼져서 주둔했으므로 보통 인도인들은 영국 군인들을 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여 이런 少數(소수)로써 多數(다수)를 다스릴 수 있었는가.
인도행정청(India Civil Service: ICS)이 그 비밀이었다. 인도행정청에는 약 1000명의 영국 공무원들이 근무했는데, 이들이 인도 각지에 파견되어 식민지 행정을 맡았다. 이 1000명이 사실상 3억 인구를 다스린 것이다. 이 3억 인구는 언어만 해도 20가지이고 지방語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다가 종교 인종도 각양각색이었다. 이런 인도를, 영국 공무원 한 사람이 30만 명씩 안정적으로 관리했던 셈이다. 이 불가사의한 행정의 비밀에 대한 연구서적이 수년 전 출판되었다.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라는 사람이 쓴 《지배계급》(The Ruling Caste, 출판은 Farrar, Straus, Giroux, 381페이지, 27달러)이 그것이다.
인도행정청에서 근무할 영국인을 뽑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영국정부는 애국심과 자부심에 기반한 公人(공인)윤리를 반복교육으로 깊게 심었다. 학생들은 인도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다. 영국정부는 이들에게 그런 현지 관련 지식보다는 '제국의 魂(혼)'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인도에 대한 지식은 현지에 부임하여 배우도록 했다. 그 대신 大英(대영)제국의 知的(지적)이고 도덕적인 우월성에 대한 교육이 행해졌다. '유럽 도서관 한 개의 선반위에 올라 있는 책이 인도와 아라비아 전체의 문학작품을 모두 모은 것보다 더 우수하다'는 식의 교육이었다.
著者(저자) 길모어씨는 이 책에서, '제국주의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무장한 이 젊은 관료들은 '책임을 떠 안는 것의 쾌감'을 간직하고 어떤 경우에도 조국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이들이 인도에 가서 부임하는 곳은 교통이 불편한 奧地(오지)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무슨 사고가 일어나도 상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할 수가 없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결단력이 요구되었다. 영국관료들은 실용주의와 상식에 기초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부임 초기부터 터득해나갔다.
소요사태를 예방하려면 우선 지배층이 민중을 자극하지 않아야 했다. 영국관료들은 인도사회의 풍습이나 사회적 관행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불태워 순장하는 식의 야만적인 풍습은 금지시켰다. 인도사람들은 세금을 내고, 지역관리들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영국인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영국관리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현지의 언어에 숙달해야 했다. 이 식민통치 관리들의 행동윤리는 피지배층을 대할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이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영국관리들은 절대로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인도 민중의 定評(정평)이 이들의 통치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인도는 독립한 뒤에도 영국행정청의 이름을 India Administrative Service로 바꾸고 그 골격을 이어갔다. 물론 영국인은 인도관리로 교체되었다. 인도는 영국관리들이 남긴 전통, 즉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한 公職(공직)규범을 그대로 계승하여 오늘날 세계최대의 민주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 행정관료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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