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할 제 쉬어감이 어떠하리.
황진이가
도학 군자 이충남을 조롱하고 달아나는
벽계수에게 던진 시조다.
벽계수는 이충남의 호이다.
송도 3절이라 박연폭포, 서화담, 황진이.
서경덕은 황진이의 유혹에 안 빠진 고매한
사람이다.
황진이가 혹시나 병신이 아닌가 잠버릇인
양 만져 봤더니,
아주 물건이 좋았다고 한다.
십년 공부 도로아비타불! 의 대명사!
면벽 수도를 9년째 하던 스님인 지족사의
'만석선사'가 계셨는데
벽만 보고 도를 닦으시는 분이다.
황진이가 화담에게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화풀이로 만석선사를 꼬셨다.
당시 송도의 뭇 남성들은 황진이와 한번
자는 게 소원이었는데,
서화담은 오히려 황진이의 육체적 유혹을 이겨
냄으로써
그녀의 존경을 받는 유일한 인물이고,
반면에 당대의 고승인 만석선사는
황진이의 유혹을 받고, 선뜻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것이다.
만석선사는 순순이 황진이랑 하루밤을 같이 잤다.
잠자리를 같이 한 후의 선사의
행동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순간의 정욕을 참지 못한 자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구나!'
한탄을 했다는 얘기와,
하루밤 자고난 대사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다시 돌아 앉아 면벽하고 참선을 계속했다는
얘기.
큰 깨달음에 이르면 여자와 하룻밤 잠자리를
하든 안하든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황진이는 선사를 파계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선사는 시침 뚝떼고 다시 면백 수도에 들어 갔다.
그 까짓 것.
색 밝히는 중생을 구제해 줬다 생각했다면 그만이다.
나중 황진이는,
차라리 서화담, 황진이, 만석선사를 송도 3절이라
부르고 싶다고 했다.
황진이는 40살에 죽었고 죽은 지 몇 날 뒤에
호걸 임백호가 여기를 지나다 황진이 묘 앞에서
제문으로 읊은 시조가 이것이다.
청초 우거진 곳에 자 난다 누웠 난다
홍안을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어 하노라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몇 해를 살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만족하고 멋지게 살았냐가 중요하다.
옮긴글---받은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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